[중앙일보] 입력 2015.09.19
김형경/소설가
“내가 태어났거나 말거나, 살아왔거나 말거나,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죽어가고 있거나 무슨 상관이랴. 늘 그래 왔듯이 자기가 누구이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실은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계속 살아갈 텐데.”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앤드루 솔로몬은 저 대목을 인용해 놓고 그것이 우울증의 한 증상이라고 설명한다. 솔로몬은 정신이 붕괴되는 중증 우울증을 경험하면서 우울증에 대한 역사·사회·문화·의학 차원에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한 책 『한낮의 우울』을 집필했다. 책에서 그가 주장하는 대표적 우울증 증상은 ‘삶이 제거된 듯한 무력감’과 ‘극심한 폭력성’이다. 그는 자신이 우울증 초기에 일으키곤 했던 분노 발작과, 친구의 갈비뼈를 부러뜨린 폭력 행위를 상세히 묘사한다. “친구들은 내가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절망과 회의였다.”
우울증 증상으로서의 폭력 행위는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다. 『소피의 선택』의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성공의 최정상에서 우울증 발작과 맞닥뜨렸다. 그는 지난한 노력을 통해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그 과정을 기록한 책 『보이는 어둠』을 출간했다. 책에는 그가 우울증 발작 직전에 변덕 부리고, 가학적 언어를 남발하고, 태연하게 타인을 모욕했던 행위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폭력 행위 속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우울증 경험자들은 말한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이 표현하는 대표적인 정서는 극단적인 두 가지 형태를 보인다. 점점 더 많은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무력감과, 걸핏하면 친밀한 상대를 향해 표출하는 과도한 폭력성. 앤드루 솔로몬에 의하면 그것이 중증 우울증 증상이며, 유럽 실존주의 작가와 철학자들이 세계대전 이후 애도 기간에 표현해 온 심리 양상들이라고 한다. 뒤늦게 마음의 문제를 알아차리고 해결해나가는 우리는 그와 같은 궤적을 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거듭 포기를 이야기하거나, 걸핏하면 분노와 폭력을 표현하는 남자들이 실은 자각하지 못한 채 우울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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