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9.12
김형경/소설가
일상 속에서 흔히 목격되는 취소 방어기제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이 다음 날 비싼 선물을 사 들고 들어가는 행위다. 아내에게 준 상처를 꽃이나 보석으로 상쇄하려는 의도인데 실제로 어떤 여자들은 폭력의 기억과 보석을 맞바꾸듯 좋아하기도 한다. 부정과 비리를 통해 큰돈을 번 사업가가 자선사업이나 장학금으로 수익의 일부를 희사하는 것도 취소행동에 해당된다.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해 번 돈으로 노벨상 제도를 만든 이들의 행위 기저에도 취소 방어기제가 깔려 있다.
모든 종교에 준비돼 있는 속죄 장치도 취소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종교는 본래 집단 구성원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기능을 했다. 그들 지도자 중 누군가는 잘못을 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죄의식을 취소하는 장치를 마련해 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회개, 속죄, 참회 등의 명칭을 가진 제도를 만들어 능동적으로 취소 방어기제를 사용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던 셈이다. 종교가 준비해둔 의례에 따라 속죄를 행하면 지난 잘못을 취소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취소 방어기제는 미숙하고 임시방편적인 생존법이어서 성숙한 삶을 저해한다. 미국 여성 폴레트 켈리가 쓴 시 ‘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는 남편의 취소행동을 용인하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이 어디인지 보여준다. 처음에 그 시는 가벼운 언어폭력을 저지른 후 보상으로 꽃을 선물하는 남편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예요. 왜냐하면 그가 꽃을 보냈거든요”라고 말하는 아내는 합리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그가 무섭지만 떠나기도 무서워요. 아이는 어떻게 돌보고 돈은 어떻게 벌지요?”하는 의존성까지 있어 점차 강도가 센 폭력을 감당해야 한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제 장례식 날이거든요. 지난밤 그는 저를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했어요.”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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