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1.2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09> JP 정치 속 건축과 민족화
5·16 직후 워커힐 건립 때 첫 인연
김수근 산꼭대기에 ‘힐탑바’ 설계
JP, 파격적 작품 세계에 깊은 인상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기슭에 세워진 워커힐 호텔은 나와 인연이 깊다. 5·16 직후 중앙정보부장이던 내가 건립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울엔 마땅한 위락시설이 없어 주한미군 병사들은 휴가 때면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리 입장에선 재정 측면에서 여간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워커힐은 연간 3만 명 규모의 미군 휴가 장병을 머물게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외화도 벌고 비상시 소집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워커힐 건설은 첨단 기자재와 신공법이 도입된 한국 건축사에 전례 없는 대역사(大役事)였다. 워커힐은 나와 건축가 김수근(1931~86)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엔 건축가라 불릴 만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건축을 본격 전공한 김수근은 전도유망한 젊은 건축가였다. 그는 워커힐 설계를 맡은 위원 6명 중 한 사람이었다. 1961년 말 설계위원들이 내게 설계도를 가지고 와서 설명했다. 아차산 산세를 따라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숙박과 위락시설 건물 26개 동이 들어차는 구도였다. 그중 역삼각형의 건물을 가리키며 김수근이 “이것은 힐탑바(Hill Top Bar)가 들어설 전망대입니다”고 말했다.
힐탑바란 말이 생소했다. 내가 “힐탑바, 그게 무슨 뜻이오”라고 묻자 그는 득의에 찬 표정으로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지은 바입니다”고 말했다. W자 형태의 묵직한 콘크리트 기둥이 땅에서 솟아오른 듯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한국에선 시도한 적 없는 새로운 공법을 적용했다는 설명이었다. 콘크리트 형상을 강렬하면서 도발적으로 노출하는 공법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설계위원들에게 “선진화된 생각이 드러나도록 마음대로 해보세요”라고 격려했다. 그 시절 기준에선 김수근의 작품세계는 파격적이었다. 힐탑바에는 김수근의 건축미학이 격정적으로 펼쳐져 있다.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바뀐 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내가 김수근에게 한 주문은 간단 명쾌했다. “자유 냄새가 물씬 나도록 설계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본관은 거대한 콘크리트 처마의 끝이 하늘을 향해 번쩍 솟아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태평양을 향해 자유롭고 힘차게 나가는 배(국가)를 형상화했습니다”고 설명했다. 둥글게 휜 콘크리트 지붕이 배의 곡면을 닮아 있었다. 조국 근대화를 통해 이루려는 자유의 이상향을 향해 거대한 배가 나아가는 느낌을 표현했다. 김수근의 건축은 독특했다. 그 속엔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근대화된 국가를 만들어 보자는 시대정신이 녹아 있었다. 5·16 혁명이 펼친 새 시대 진운(進運)의 정신은 공산주의 침략을 막는 ‘자유’이며 그 정신이 건축에 담긴 것이다. 자유센터는 지금도 남산 국립극장 건너편에 남아 있다.
자유센터 설계로 김수근은 한국이 자랑할 만한 건축가로 자리매김을 했다. 나는 상식적인 후원을 해줬다. 그의 또 다른 대표적인 설계 작품으로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다. 그 설계는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67년 한 일간지가 부여박물관이 일본 신사를 연상케 하는 왜색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한·일 수교 직후 국내 분위기와 얽혀 왜색 논쟁이 불붙었다. 내 느낌에도 일본 건축풍의 요소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수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신문에 칼럼을 써서 “이 설계는 백제의 양식도 일본의 신사 양식도 아닌 현대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바로 김수근의 양식”이라고 반박했다. 김수근은 건축에 관한 한 뜻을 굽히지 않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자랑할 만한 선조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중앙청부터 서울시청에 이르는 세종로 양쪽에 죽 세워놓으려고 했다. 이탈리아 산 대리석을 수입해 멋지게 조각을 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나라 형편에 그런 돈은 없었다. 예비공정 차원에서 석고(石膏)로 사람 키만한 크기의 상을 만들어 세우기로 했다.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장군부터 백범 김구 선생까지 민족의 영웅 37인을 선정했다. 월탄 박종화 선생, 노산 이은상 선생과 함께 내가 머리를 맞대고 선정한 위인들이었다. 64년 5월 16일 역사인물 석고상이 당시 은행나무가 늘어선 세종로 양쪽에 세워졌다. 석고상은 몇 달이 지나자 비바람에 금이 가고 깨졌다. 석고상을 석상으로 교체하기 위해 뜻이 있는 기부자를 찾아봤지만 돈을 댈 사람이 드물었다. 결국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못한 채 훼손된 석고상들은 헐어버리고 말았다.
5·16민족상 이사장이었던 67년, 나는 민족기록화 제작 사업을 추진했다. 조국 수호를 위한 전쟁기록을 화폭에 담기 위한 사업이었다. 유적과 유물로도 역사를 보고 배울 수는 있지만 실감나게 느끼기엔 그림만한 것이 없다고 봤다. 민족기록화제작 발족위원회를 구성하고 화단의 내로라하는 구상(具象)화가 55명에게 기록화 제작을 의뢰했다. 동학군 의거와 독립운동, 해방과 6·25 전쟁, 월남군 파병까지 영웅적인 한국사의 55개 장면을 선정했다. 그때까지 한국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500호(3.3X2.5m) 25점, 1000호(5.3X2.9m) 30점의 초대형 작품이었다. 작품의 크기나 양으로 볼 때 엄청난 작업이었다. 국내에선 그런 대형 그림을 그릴 만한 미술 재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유화물감은 전문가가 쓰기엔 품질이 떨어졌다.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캔버스와 붓, 물감 등을 구입해 들여와 화가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큰 그림을 그릴 장소도 제공해 줬다. 화가들은 열정과 기량을 뿜어냈다. 국난을 극복한 조상의 투혼과 슬기를 화폭에 담았다. 그 시절 그런 초대형 그림을 그리는 것은 우리 화단에선 거의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민족기록화 제작은 내가 총리가 된 이후 문화공보부가 맡아 국가 사업으로 재개됐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을 향해 진격하는 장면을 비롯해 일제에 맞서 싸워 승리한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빛나는 전투장면들을 300호(2.9X2.1m) 캔버스 위에 재현했다. 경제발전상과 문화업적에 대한 기록화가 차례로 제작됐다. 민족의 발자취를 모두 그려서 영구히 남겨놓기 위한 시도였다.
이때 그려진 기록화들은 중앙청 복도와 청와대 본관 벽에 걸려 전시됐다. 나는 에든버러 성에서처럼 이순신 장군의 그림이 걸려 있으면 만지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이 새까맣게 손때를 묻혀 놓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 관객들은 만지지 않았다. 이 기록화들은 80년대 들어 박물관으로 바뀐 중앙청의 벽에서 떼어져 지하 창고에 보관됐다. 그 후 95년 중앙청 건물(옛 조선총독부)이 철거됐고 지금은 그 작품 대부분이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활자에 갇힌 역사를 화폭에 펼쳐낸 의미 있는 작업들이 사장(死藏)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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