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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혁명은 원래 애국심에서 나와 마오쩌둥의 대장정도 그랬다” “인민 잘 살게 하는 게 최상의 가치 덩샤오핑 ‘흑묘백묘’ 5·16 정신과 일치”

바람아님 2015. 11. 28. 00:39

[중앙일보] 입력 2015.11.2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10> JP가 본 중국의 리더십
중공 제4야전군의 6·25전쟁 참전
마오쩌둥, 미국에 힘 보여주려한 것
중국 지도자들 관통하는 공통점은
사(私) 버리고 공(公)을 취한 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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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27일 김종필(JP) 국무총리가 방한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부주석 겸 공산당 정치국 상무 위원을 총리실에서 만나 회담을 했다. 김 총리는 “후 부주석은 차기 중국 주석의 승계 예정자로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려는 표정이 역력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98년 2월 JP가 공산당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회담한 것에 대한 ↗ 답방 형식이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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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를 싫어한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공산주의 중국의 변모는 경이롭게 다가온다. 나는 아시아 역사의 3대 성공사례로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한국의 근대화,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함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중국 개혁 개방정책을 꼽은 적이 있다. 오랫동안 중국 공산당은 자유 대한민국의 대륙 진출을 가로막아 우리는 근대화의 방향을 해양으로 돌려야 했다. 이제 중국은 세계 모든 곳에 문호를 열어놓고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대국(大國)으로 성장했다. 시장경제가 화려하게 꽃핀 것을 보면 중국을 엄격한 의미에서 공산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됐다. 그 장구한 역사와 광대한 대륙이 어떻게 짧은 시간에 눈부시게 바뀌었을까. 한마디로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힘은 정치 리더십이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부터 지금의 시진핑(習近平) 주석까지 수 세대에 걸쳐 중국 지도자들은 저마다 특장(特長)을 갖고 기회가 오면 그 기질을 발휘해 나라를 안정되게 발전시켰다. 그들의 정신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사(私)를 넘어 공(公)을 취한 애국심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공(中共)의 존재를 체험한 것은 1952년 말 6·25전쟁의 화천지구 전투에서였다. 나는 수색중대장으로 1개 소대를 이끌고 나가 북한강 지류인 금성천 근방에서 중공군 포로 10여 명을 생포했다. 이들로부터 적정(敵情)을 세밀하게 파악해 정확한 공격이 가능했고 중공군의 포위망이 뚫림으로써 아군 1개 대대(약 500명)가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공으로 충무무공훈장과 미국 동성무공훈장을 받았지만 당시 중국 공산군대의 수준과 위력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한밤중에 양철통·북·꽹과리·사발 등을 요란하게 두드리면서 산의 북사면(北斜面)을 “라이라이”(來來:덤벼봐) 외치며 달려오면 공포감에 뒷머리가 쭈뼛 올라간다. 군대의 숫자만 믿고 막무가내로 밀고 내려 온다는 뜻으로 그들의 병법을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고 낮춰 부른다. 하지만 압록강을 넘어 온 펑더화이(彭德懷)의 중공인민지원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정예 중의 정예부대였다. 마오쩌둥 군대의 으뜸가는 전략가였던 린뱌오(林彪)와 펑더화이가 차례로 지휘한 제4야전군 40만 명이다. 당시 참전 중공군이 80만 명이니 100만 명이니 하는 소리들도 있지만 과장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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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야전군은 항일전과 국공 내전, 인도차이나 국경 부근의 남지나(南支那·남중국)를 포함해 광활한 중국 대륙을 누비며 단련된 병사들이었다. 이들의 군기는 엄격했고 사기는 높았다.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유격·매복·기습과 심리전에 능란했다. 마오쩌둥은 1930년대 8만 명의 홍군이 8000명으로 줄어든 고난과 죽음의 1만2500㎞ 대장정(大長征)을 이끌었다. 인민과 군대가 하나가 되는 소위 인민전쟁론은 그때의 시련에서 완성되었다. ‘인민은 물이고 군은 물고기’.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군과 인민은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전쟁론은 과거의 전략전술을 뒤집는 창의적인 실전 이론이었다. 마오쩌둥이 제4야전군을 6·25전쟁에 참전시킨 것은 김일성을 돕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 미국에 보여주고 과시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마오쩌둥의 혁명은 서세동점(西勢東漸), 열강이 중국을 야금야금 집어먹던 시대에 일어났다. 마오쩌둥의 공산주의는 외세를 몰아내고 가난에 찌든 국민을 구해야겠다는 열정, 조국애에서 비롯됐다. 원래 혁명은 계급적 이론이 아니라 순정한 애국심에서 출발한다. 그의 봉기를 혁명이라 하지 말고 애국심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나라를 송두리째 바꿔 저열한 민족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격정적 역사인식이 마오쩌둥의 혁명성에 깔려 있었다. 마오쩌둥이 발휘했던 특출한 시심(詩心)과 인문학적 소양, 자기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는 탁월한 지도자들의 보편적 속성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특성 없이 위대한 지도력이 행사되는 경우는 드물다. 마오쩌둥은 주변에 좋은 인물이 구름처럼 몰렸다. 그가 지도자의 싹을 보이니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목숨을 바쳐 싸우게 만들었다. 싹이 보이면 인걸(人傑)이 모이고 싹수가 없으면 인물은 흩어지는 법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에게 패해 대륙에서 밀려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나는 1964년 만난 적이 있다. 대만의 장제스 총통은 자신의 패인을 국민과 유리된 군대, 부패로 혼탁해진 국민당 정부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했으나 졌다’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언젠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할 것”이란 결의를 보였는데 이미 원자폭탄까지 개발하고 있는 중공의 본토를 오늘의 대만 정부가 무슨 수로 수복하겠는가.

 마오쩌둥의 치명적 과오는 건국(1949년) 후 나라를 다스리면서 전개한 소위 문화혁명(1966~76년)이었다. 혁명과 전쟁으로 뒤집어진 세상을 한 번 더 뒤집으라고 마오쩌둥은 홍위병(紅衛兵)에게 명령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격하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직접 썼고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말로 반란을 선동했다. 10대 학생·대학생이 주력인 홍위병이 당과 국가의 제도, 기관을 공격하면서 중국은 내전 상황으로 치달았다. 문혁 10년간 중국 대륙 전역이 폭력과 혼돈의 광기에 휩싸였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 린뱌오 등 대장정의 동지들을 적으로 내몰아 일부는 제거·처단했다. 현 중국 주석인 시진핑의 아버지(시중쉰·習仲勳)도 문혁의 희생자였다. 중국 대륙을 온통 자기 손아귀에 넣고 뒤흔들어 보겠다는 마오쩌둥의 권력 욕심이 문혁을 배태한 요인이었다. 세상을 좋게 뒤집는 혁명적 애국심과 세상을 뒤집어 망치는 무분별한 권력욕이 마오쩌둥 안에 혼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광기의 시대에 마오쩌둥을 뒷받침한 사려 깊은 제2인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였다. 그는 건국부터 문혁이 끝나는 76년까지 27년 동안 마오쩌둥 아래서 총리를 지내면서 내정과 외교를 세심하게 관리했다. 그는 특히 적과의 교섭에 솜씨를 보였다. 40년대엔 장개석의 국민당과 항일(抗日) 국공합작을 이뤄냈고, 70년대엔 닉슨의 미국과 데탕트(긴장완화)를 열었다. 저우언라이는 머리가 좋았다. 권력 도전에 민감한 마오쩌둥이 의심할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에게 제3인자, 4인자처럼 처신하며 충성을 바쳤다. 그렇게 얻은 신용을 가지고 저우언라이는 72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총리와 중·일 국교 협상을 혼자 다했다.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우언라이가 하는 말을 믿었다. 마오쩌둥 앞에서 저우언라이의 굴신(屈身)은 억지나 가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치국(治國) 철학이 일치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아주 의심이 많은 권력자였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마음을 지그시 눌러놓고 자기 생각대로 나라를 끌고 나갔다. 저우언라이를 보면서 나는 ‘아, 마오쩌둥은 참 좋은 사람을 옆에 뒀구나’ 하며 종종 감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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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월 김종필(JP) 공화당 의장이 대만을 방문, 장제스(蔣介石) 자유중국 총통을 만났다. [중앙포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같은 해(76년)에 나란히 죽은 뒤 새로운 중국을 탄생시킨 주인공은 덩샤오핑이다. 그는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4인방을 제거하고 중국을 재생시켰다. 덩샤오핑은 문혁으로 정치생명이 끊어졌을 때 저우언라이의 도움을 받았다. 저우언라이가 전략적인 사람이라면 덩샤오핑은 시대를 선점(先占)해 끌고 간 지도자다. 덩샤오핑은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전한 일본과 미국의 현장을 두루 여행해 시장경제 철학을 체득했다. 그는 문화혁명으로 피폐한 중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사회주의와 시장경제가 병존할 수 있다는 국가경영 철학을 실천에 옮겼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식 실용주의는 5·16혁명정신과 일치한다. 박 대통령과 나는 어설픈 명분이 지배하던 정치세계를 실용으로 변모시켰다. 덩샤오핑에겐 인민을 잘 살게 하는 일이 당과 국가가 선택할 최상의 가치라는 요지부동의 신념이 있었다. 이 신념은 내 개인의 욕심을 죽이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대의(大義)에 몸을 던질 때 비로소 보이는 가치관이다. 내가 만나봤던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그리고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90년대 이후의 지도자들은 덩샤오핑이 창안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계승·발전시켰다.

 덩샤오핑의 또 다른 위대성은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다. 그는 과거와 전혀 다른 미래를 열어가면서도 과거를 부정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문혁 시절 그는 유배·연금됐고 그의 아들은 홍위병의 고문에 시달리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불구자가 됐다. 그런 덩샤오핑이지만 마오쩌둥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지 않았다. 마오쩌둥에 대해 “공칠과삼(攻七過三)” 즉 공은 7이고 과는 3이라고 평가했다. 문혁에 대해선 “나쁜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이다. 사람들의 사고를 촉진하고 우리들의 단점을 인식하게 해주었으니까”라고 말했다. 과거와 다른 미래를 추구하지만 과거의 축적 없이 미래가 있을 수 없다는 연속적이며 긍정적인 역사관이 덩샤오핑 이래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흐르고 있다. 그렇게 역사와 마주하는 자세가 오늘의 대국 중국을 키웠다. 과(過)는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고, 공(功)은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키우려는 중국식 풍토는 한국에선 찾기 어렵다.

 지금 시진핑 주석도 2013년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 기념식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오늘의 시대조건, 발전수준, 인식수준을 가지고 과거의 인물을 평가하거나 요구할 수 없다.” 덩샤오핑 이래 중국 지도자들은 애국심, 실용주의, 연속적 역사관으로 나라의 안정된 발전을 이끌어 가고 있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선거로 뽑히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보다 효과적이고 안정적인 리더십 체제를 구축했다. 정치를 하려는 젊은이들은 당이나 행정의 밑바닥에서부터 자신을 단련하고 상급기관으로부터 가치관과 실력을 검증받아가며 차근차근 성장해 간다. 신장(新疆)부터 상하이까지 비행기로 7시간 걸리는 광대한 땅, 중국과 중국인의 대변화는 정치가 일으킨 것이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인물 소사전 장제스(蔣介石·1887~1975)=20세기 중국의 항일·내전 시기 국민당 정부의 주석. 대륙의 지배권을 두고 마오쩌둥(1893~1976)의 공산당과 일전을 벌였으나 패퇴, 1949년 대만으로 쫓겨나 자유중국 총통으로 취임했다. 20년대 후반 상하이·베이징·난징 등을 장악해 지방군벌을 토벌하고 30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중국 공산당 포위전을 전개했다. 36년 ‘공산당과 내전을 중지하고 거국일치 항일전쟁’을 요구하는 내부 세력에 연금당하는 이른바 ‘시안 사건’ 뒤 국공(國共) 합작 항일전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46년 다시 중공과 결별했다. 김구 선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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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김무성 "민주노총 없었다면 국민소득 3만 달러 넘어 선진국 진입했을 것"

[중앙일보] 입력 201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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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사진 뉴시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7일 “과격한 불법투쟁 시위만을 일삼는 민주노총이 대한민국에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서 선진국에 진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날 오후2시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노동개혁 청년 일자리 창출 토론회’에서 “노동개혁에 대해 노사정협의를 통해 합의를 봤고 그 내용을 가지고 만든 법을 야당에서 수용하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총선을 앞두고 야당을 흔드는 세력이 민주노총이라는 인식이 깔린 얘기다.

김 대표는 “현대차를 비롯한 대형 기업체 노동현장에서 이미 전세계 최고 수준의 급여와 복지 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부족하다고 월급을 올려달라고 매년 불법파업을 하고 공장을 2~3달간 중단해왔기 때문에 우리 경제가 어렵다”며 “그런데도 현대차가 안 망하고 버티고 있다. 전부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해서 (소비자가)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민주노총이 주도한 11ㆍ14 ‘민중총궐기’ 집회를 언급하며 “지난 14일, 우리나라 심장부 광화문 시청 앞이 불법시위로 무법천지가 됐다.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불법 시위를 허용해선 안된다”며 “53개 단체들이 내달 5일 (무법천지를) 재현하기 위해 집회를 한다고 하는데 당국에서 불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김 대표는 “경찰들이 엄청난 시위대의 불법 폭력에 몸을 다쳐가면서 현행범을 잡아가도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고 훈방조치 한다”며 “사법부가 우리나라 공권력 확립을 위해, 국민 안전을 위해 정신차려야 한다”고도 했다.

김 대표는 이런 노조의 무력시위를 규탄하면서 노동개혁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그는 “노동개혁 완수와 성공은 우리에게 더 크고 희망찬 내일을 가져다 줄 것이지만 반대로 실패하면 청년과 국가의 미래가 좌초할 수 있다”며 “정기국회는 노동개혁의 골든타임이며 이 기간 내 노동개혁 5개법안(근로기준법·고용보험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기간제 법·파견법 개정안)을 마무리 하지 않으면 파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김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