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태양이 되고 싶었다…한일협정이 큰 보람, 민주주의는 피 아닌 빵 먹고 자란다”
[중앙일보]
입력 2015.12.0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12> 정계를 떠나다
노 대통령 탄핵 역풍 분 2004년 총선
JP 43년 정치 인생의 마지막 무대
“5년 단임 대통령제로 정치 황폐화
내각 책임제로 바꾸는 건 후진들 몫”
”
그는 국가의 표상으로서 대통령직에 대한 인식보다 특정 정파나 세력의 입장에서 세상을 편을 갈라 보려는 시각을 드러내곤 했다. 그는 2003년 12월 청와대 송년 행사에서 “내년 총선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구도로 가게 될 것이다.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타이태닉호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의 선거 개입 시비는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의 대통령 탄핵안 통과로 귀결됐으나 민심의 저변에선 야 3당에 분노하는 역풍이 불었다. 노 대통령의 경솔하고 거친 언행에 염증을 냈던 국민도 막상 현직 대통령이 국회 다수의 힘에 밀려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대통령을 보호하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민심은 겉으론 얌전해 보여도 순식간에 조련사를 물어뜯는 우리 속의 호랑이와 같다. 욕심이 과하거나 독선·오만이 지나친 쪽을 후려치는 게 민심의 어김없는 속성이다. 창당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열린우리당은 한순간에 152석의 거대 여당으로 변신했다. 국회를 좌지우지하던 한나라당은 제2당으로 내려앉았고, 집권당 지위를 열린우리당에 넘겨준 민주당은 9석으로 껍데기만 남았다.
탄핵 역풍은 총선에서 자민련에 치명상을 입혔다. 대전·충북에선 한 석도 못 건지고 충남에서만 겨우 4석을 얻었다. 지역 유권자들은 충청권으로 신행정수도를 이전하겠다는 열린우리당 정부를 지지했고 노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한 것으로 비친 자민련을 외면했다.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나도 낙선했다. 9선을 지낸 나의 국회의원 선거 사상 최초의 패배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국회 9선 동창생이다. 언론에선 10선 의원의 탄생을 예측했으나 불발됐다. 충격이었다. 사흘간 두문불출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돌이켜 보면 95년 자민련 창당 이후 당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96년 선거에서 50석 정점을 찍었던 당세는 2000년 총선에서 17석으로 줄더니 급기야 2004년 한 자릿수 의석으로 추락했다. 용두사미처럼 꼬랑지만 남았다. 유권자는 나이 일흔여덟 내 가슴에서 금배지를 떼어 갔다. 민심이 나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듯했다. 최초의 패배를 마지막 패배로 삼기로 했다. 세상이 변했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잠들기 전에 몇 마일 더 가야 하지만 나아갈 여력은 소진됐다.
2004년 4월 19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자민련 당사. 총선 당선자 모임의 축하인사를 하면서 나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고 했다. 43년간 정계에 몸담아 왔고 이제 완전히 연소(燃燒)되어 재가 됐다.
일찌감치 떠날 수도 있었지만 무언가 세워 놓고 떠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나는 오늘 정치를 떠나기로 했다.”
세상에 타다 남은 나무토막처럼 추한 게 없다. 아낌없이 타야 한다. 활활 타서 하얀 재가 돼야 한다. 어떤 인생도 자기를 다 태울 자격이 있다. 정치적으로 나는 완전 연소됐고 재만 남았다. 그렇다 해도 아쉬움이 없을 순 없었다. 사실 나는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자 했다. 온 지구를 하루 종일 덥혔던 태양이 서산에 이글거리며 지는 것처럼, 그렇게 내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다. 내일 또다시 떠오를 태양을 기약하며 서해의 붉은 낙조로 빨려 들어가는 햇덩어리가 되길 나는 욕망했다. 괴테가 “창문을 열어라. 빛을 더…”라면서 죽음을 맞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기상(氣像)일 것이다.
‘하얗게 타 버린 재’와 ‘서쪽 하늘의 벌건 태양’ 간 괴리는 내게 아쉬움이요, 더 가고 싶었던 몇 마일이다. 후배 정치인들이 이 괴리를 메워 주길 바랄 뿐이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대통령을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5년 단임 대통령제, 정치를 문제 해결을 위한 공존과 협상의 장이 아니라 편을 갈라 싸우는 전투의 현장으로 변질시키는 대통령 중심제 헌법구조를 의원내각 책임제로 바꿔야 한다. 내각제는 나의 정치무대에서 씨앗이 뿌려졌으나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건 후예들이 선택할 몫이다.
내 정치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62년)과 DJP 후보단일화 결단(97년)을 들고 싶다. 그 일엔 비난과 욕이 쏟아졌지만 역사의 전면에 서는 도전과 성취의 보람이 있었다. 대일 협상은 누군가 죽을 각오로 나서 담판을 짓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역사의 난제였다. 혁명에 목숨을 걸어 봤기에 나는 겁 없이 달려들었다. “이완용 같은 매국노”라는 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번듯한 자유민주주의를 영위하기 위해 그 기반이 되는 경제 건설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이케다(池田) 총리든 오히라(大平) 외상이든 그들과의 대좌에서 나는 의연하고 당당했으며 의표를 찔렀다. 포항제철·울산화학공업단지·경부고속도로 같은 근대화 성장의 밑천이 한·일 수교로 마련됐다. 오늘날 어느 선진국 못지않은 자유민주주의, 그 바탕이 된 세계 경제 10위권의 경제력은 한·일 교섭에서 장만한 밑천에서 시작됐다. 일본을 딛고 대양(大洋)으로 뻗어 가는 도약과 개방의 국가적 기운도 한·일 국교정상화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민주화 시대에 지역 분열의 폭발적 양상은 내가 대선후보 단일화로 김대중(DJ) 대통령의 탄생을 도움으로써 완화됐다. 이때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지자나 보수진영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욕을 무던히 먹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 정치 발전에 좋고,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후회하지 않는다. DJ는 박 대통령 치하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정치적으로 박해받은 사람이다. 내가 아니면 박 대통령이 진 그 빚을 갚을 사람이 없었다. DJ가 네 번째 대선 도전에도 실패했다면 호남 민심의 좌절은 역사의 한(恨)으로 증폭해 한국 사회에 그림자를 길게 남겼을 것이다. 나는 역사를 봤고 현실을 직시했다. 미래를 위해 DJ를 지지했다. DJ에겐 “대통령이 되면 박 대통령에 대한 원한을 풀고 박정희 기념관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시대의 과제였던 두 적대 진영의 해원(解寃),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역사적 화해는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이렇게 보면 정치는 쏟아지는 욕을 참아내면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정치지도자들은 국민이 듣고 싶은 것만 얘기하려는 포퓰리즘적 성향이 강하다. ‘국가가 무엇이냐’ ‘정치를 왜 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대답할 만한 국가관, 정치관을 지니고 있는 정치인이 많지 않다. 국회의원 몇 번 더 하려는 생각만이 지배적인 건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고 따져 봐야 한다. 나라와 역사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는 욕먹는 일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필요하면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윈스턴 처칠에겐 세 가지 용기가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남에게 미움 받는 용기, 그 무엇을 자신 이상으로 사랑하는 용기다. 61년부터 2004년까지 43년 정치인생을 나는 이런 용기를 가슴에 품고 살려고 했다. 미래는 예측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래는 예측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유한의 끝에서 무한의 입구를 쳐다보고 있다. 놔둘 건 놔두고 이룰 건 이뤘다. 유한은 완성과 충족으로 무한으로 연결될 것이다. 그동안 ‘김종필 증언록’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