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와 싸운 7년, 골프채 다시 잡은 JP “신체 온존함 증명하는 격렬한 의식”…박정희, 짧게 끊어쳐 해저드 공략…JP “골프 스타일처럼 치밀한 국가운영”
[중앙일보] 입력 2015.11.30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11> JP 정치 속 골프
물속 걷기, 남산길 보행 꾸준한 재활
특수 카트 의지, 70분 만에 1홀 돌아
검도 자세 녹아든 ‘JP식 8자 스윙’
레슨 한번 안 받고 스스로 연마
이병철 회장, 경영하듯 정교한 골프
정확한 샷 날린 후엔 “못되게 치지요”
나는 골프장 잔디에서 ‘백구백상(白球百想)’이란 생각을 떠올린 적이 있다. 골프채를 잡고 흰 공과 마주치면 백 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골프의 기본은 절제다. 필드에서 욕심을 부리면 망가지거나 지게 돼 있다. 백구백상은 무리함을 경계하는 글귀다. 그날 술자리에서 잠시 열어놓은 무절제가 나를 지금까지 휠체어 신세로 만들었다.
나는 ‘세월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을 때 비로소 늙게 된다’는 새뮤얼 울먼의 시 ‘청춘’을 되뇌며 물속 걷기, 남산 산책길 보행 등으로 팔과 다리의 근력을 키워 왔다. 특수 장비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내가 골프를 칠 수 있는 것은 왼손과 왼팔이 멀쩡한 덕분이다. 골프는 두 팔로 하는 운동이지만 힘의 작용은 왼팔에서 이뤄진다. 오른팔은 왼팔에 따라붙을 뿐이다.
경기도 고양의 뉴코리아CC는 7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골프를 쳤던 곳이다. 나는 골퍼들이 다 지나간 늦은 오후 1번 홀에서 골프 여정을 다시 이어갔다. 특수 카트에 몸을 의지한 뒤 혼자서 한 홀을 돌면서 자연과 호흡했다. 왼손만으로 클럽을 쥐는 하프 스윙 탓에 나의 드라이브샷 거리는 길어야 50야드였고 페어웨이에서 타수마다 30여 번 클럽을 휘둘렀다. 티 박스에서 그린에 올라가기까지 1시간10분쯤 걸렸다. 나도 모르게 “자~ 됐다”고 내뱉었다. 그날의 골프는 나의 신체가 온존함을 증명하는 격렬한 의식(儀式) 같은 것이었다. 짙은 풀냄새를 맡으며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드는 신선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연은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내가 골프와 인연을 맺은 것은 혁명 직후인 1961년 7월 하순께였다. 혁명 분위기에 골프장에 나가는 걸 모두 꺼려 했지만 나는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운동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솔선해 골프장에 나갔다. 군자리 컨트리클럽(현 어린이대공원)에서 김정렬 전 총리와 장지량,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이 나의 첫 골프 동반자들이다.
나는 평생 골프레슨을 받은 적이 없다. 스스로 나의 체형에 맞는 자세를 연마했다. 천천히 올려 과감하게 후려치는 나의 드라이브샷을 놓고 ‘JP식 스윙’이라고 한다. 검도를 휘두르는 모습 같다며 ‘8자 스윙, 검도 타법’이라고 수군댄다. 중학교 시절 배운 검도 자세가 녹아 들어간 때문일 것이다. 몸통보다는 팔에 의존하는 방식인데 자세야 어떻든 나는 파워를 실은 임팩트 요령을 안다.
골프는 각양각색의 인간 성품을 담아내고 그 시대가 처한 다양한 정치적 환경을 드러낸다. 박정희 대통령과 골프 추억은 내 머릿속에 강렬히 남아 있다. 5·16 혁명 직후 최고회의에서 “골프장을 모두 갈아엎어 식량증산을 위해 콩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의를 했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나는 최고위원이 아니어서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나는 급히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지금 외자 도입에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는데 몇 안 되는 골프장을 몽땅 없애면 외국 바이어들이 서울에 오고 싶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 최고회의 결의는 바뀌었고 얼마 안 돼 박 대통령도 골프를 좋아하게 됐다.
박 대통령의 골프 실력은 90타쯤 되는 보기 플레이어였다. 거리에 욕심내지 않고 방향을 중시하면서 쇼트 게임도 잘하는 또박이 골퍼였다. 해저드가 앞에 있으면 바로 넘기지 않고 짧은 아이언으로 끊어가는 쪽을 택했다. 박 대통령의 국가운영 자세는 그의 골프 스타일처럼 실용을 우선했고 사전 준비가 치밀했다. 그는 국정운영에서 포퓰리즘적 환호를 경계했다. 박 대통령과 골프를 하면서 그늘 집에 들어가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어 만든 ‘막사이다’를 나눠 마신 기억이 새롭다. 박 대통령은 필드에선 무겁고 골치 아픈 화제를 멀리했으며 ‘내기’는 싫어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는 ‘수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안양컨트리클럽에서 자주 골프를 쳤다. 이 회장의 골프는 경영 스타일과 빼닮았다. 골프 실력은 핸디캡 12 정도였는데 정교하고 꼼꼼하게 쳤다. 그는 정확하게 샷을 날린 후에는 동반자들을 향해 “못되게 치지요~”라고 말하며 웃곤 했다. 그 말은 이병철 회장 식 특유의 겸손함을 표시한 것인데 그때마다 라운딩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60년대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내기 골프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 의원, 신진자동차 김창원 사장과 주로 어울려 골프를 쳤다. 김형욱은 내기를 하다 질 것 같으면 판돈을 배로 올리는 ‘따블’ ‘따따블’을 부르곤 했다. 하지만 15, 16홀쯤에도 계속 지게 되면 비서를 시켜 “지금 각하가 부장님을 급히 찾습니다”라는 엉터리 보고를 하게 했다. 그 보고 내용을 이유로 대며 김형욱은 내기 돈도 주지 않고 그냥 도망쳐 버렸다. 그 때문에 ‘김형욱에게 돈 안 잃은 사람 없고, 김형욱에게 돈 따본 사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90년 민자당 3당 합당 직전 나는 고인이 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와 골프를 쳤다. 그때 YS가 드라이브샷을 하다 실수해 엉덩방아를 찧던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 장면은 합당을 위한 골프 회동이라고 지금도 소개되곤 하는데 정작 그날 필드에서 합당 얘기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일본의 전·현직 총리와도 자주 골프운동을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와 골프운동은 특별나다. 그는 60년대부터 나와 오래된 친우다. 83년 8월 일본 여행 중 왕실 별장으로 유명한 휴양지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골프를 쳤다. 그때를 계기로 매년 8월 1일이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곳에서 만나 운동을 했다. 가루이자와 골프장엔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 회장도 합류했는데 한·일 현안의 실마리가 풀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골프에 대해 조그만 자랑거리가 있다. 주말골퍼들이 통상 사용하는 스코어 기록방법은 70년대 초 총리 시절 내가 고안한 게 퍼져나간 것이다. 매 홀의 기본 타수보다 많이 치면 +○개, 적게 치면 -○개 하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성적을 계산하기가 무척 쉽다.
내가 좋아하는 최고의 골프선수는 박세리다. 내가 DJP 공동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하던 98년 7월 박세리는 US오픈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온 나라가 IMF 외환위기로 침울했던 그때 그 ‘맨발 투혼’은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박세리를 격려하기 위해 그의 부모, 동료 프로골퍼들을 함께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으로 초청했다. 식사를 하면서 “박세리 선수의 승리를 향한 집념과 의지가 빛나고 고마웠다. 특히 연못에 발을 담그기 위해 양말을 벗을 때 구릿빛 종아리와 대조되는 발목 아래 하얀 피부는 잊을 수 없는 명품이다. 한국 여성의 속살은 이 정도다”라고 치하해 모두가 웃었다.
그 시절 나의 골프 예찬을 놓고 일부 언론에선 이를 비난하곤 했다. 나는 “내가 근무시간에 골프 치는 것도 아니고 나이 칠십 넘은 사람이 골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앓아 누우면 대신 앓아줄 것도 아니면서 왜 간섭하느냐”고 응수했다. 골프는 버릴 수 없는 개인 취미였지만 나는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로서 지평을 넓히려고 다짐했다.
나는 박세리의 우승을 발판으로 골프에 대한 국가적 후원에 나섰다. 총리인 나의 이름을 딴 골프대회가 만들어졌다. 99년 9월 88컨트리클럽에서 ‘JP컵 여자오픈골프대회’가 열렸다. 총상금이 2억원이었다. 정일미 선수가 우승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국내 최대, 최고 수준이었다. 지금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대회의 상금도 거액이고 대회도 많지만 그때 환경은 그렇지 못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