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日常 ·健康

[시선 2035]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바람아님 2016. 1. 17. 00:12

[중앙일보] 입력 2016.01.15 

기사 이미지

이 현/JTBC 경제산업부 기자


서른 살을 며칠 앞두고 동갑내기 일곱이 모여 앉았다. 점집에 좀 다녀본 친구가 “ 87년 토끼띠 삼재(三災)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동짓날을 기점으로 악한 기운이 다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몇 년 동안 공연계에 ‘열정노동’을 바치다 끝내 퇴사를 결심한 친구도, 희망퇴직의 광풍을 비껴간 친구도 “이제는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수긍했다. 삼재를 정말 믿는다기보다, 지난 3년보다 더 힘든 시간이야 있겠느냐는 안도였다.

 빠져나간 건 삼재만이 아니었다. A는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음날 아침에 머리가 한 뭉텅이씩 빠진다고 했다. 머리를 가슴팍까지 길게 길러 말총머리를 하고 나온 B를 보고는 다들 “숱이 너무 없어 볼품없다. 차라리 짧게 자르라”고 한마디씩 한다. 나는 조용히 휑해진 내 앞머리를 더듬어 봤다.

 여느 탈모 입문자들처럼 일찌감치 샴푸부터 바꿔 써봤다. 홈쇼핑에서 열 통 가까이 묶어 파는 걸 샀는데, 한 통도 다 쓰기 전에 효과도 없고 머리만 뻣뻣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에 10만원이 넘는 두피 관리도 받아봤다. 잔머리가 조금 올라오긴 했지만 관리받은 덕인지 계절이 바뀌어서인지 아리송하다. 남자들의 탈모 고민은 더 깊다. 주위에서 “30대에 진입하며 소문자 엠(m) 정도였던 이마가 대문자 엠(M)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탈모치료제 프로페시아는 한국 남성에게 펜잘이나 타이레놀만큼 친숙한 약이 됐다.

 외모지상주의가 눈·코·몸매·얼굴 크기에 이어, 털까지 트집 잡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해보지만 빠지는 머리칼에 신경을 끄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탈모 인구가 1000만 명에 탈모 시장은 4조원 규모로 성장했다고 한다. 청소년기까지는 탈모가 드물다는 걸 감안해 성인 인구로만 따지면 네 명 중 한 명은 탈모라는 얘기다.

 탈모 샴푸의 과장광고 실태를 조사한 한국소비자원 조사원은 단호했다. “탈모치료제는 국제적으로도 몇 개 안 됩니다. ‘의약외품’ 샴푸나 두피관리 서비스나 탈모 개선 효과가 전혀 없다는 걸 꼭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이라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속으로 절망했다. 탈모는 유전적 요인이 가장 크고, 스트레스 관리가 그나마 효과 있는 방법이란 게 의학적으로 검증된 ‘팩트’다. 그렇다면 해법은 둘 중 하나다. 다시 태어나든지, 일이고 월세고 결혼이고 다 내려놓고 마음의 평화를 얻든지.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했는데, (빠지는 머리를) 이렇게 둘 수도 없고 이렇게 다 그만둘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왔다.

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