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바둑은 인간의 게임

바람아님 2016. 3. 14. 23:53
조선일보 2016.03.14. 03:05

나는 열성적인 바둑 애호가이다. 유년기,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기력이 아마추어 3단 정도 된다. 바둑은 내게 게임이라기보다 사람살이의 편력(遍歷)을 요약한 스토리거나 인생의 축도(縮圖)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 스토리는 변화무쌍해진다.

구글의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와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결이 장안의 화제이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유는 인간이 기술에 정복당할 것인가라는 화두 때문이다. 첫 판에서 이세돌이 패하면서 인간계는 충격으로 술렁였다. 미디어에서는 '인간이 기계에 무릎을 꿇다'라는 선정적인 카피를 뽑았다.

바둑의 별칭으로 '수담(手談)'이라는 말이 있다.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는 뜻이다. 대국 중에 말을 하지 않지만 상대의 감정과 의중은 손길로부터 전해진다. 심지어 바둑판에 돌을 놓는 맵시로 판세의 유, 불리를 직감하기도 한다. 상대의 전언(傳言)과 그에 반응하는 과정이 한 판의 바둑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판에서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치를 상회하는 알파고의 실력이 아니라 이세돌의 반응이었다. 노회한 고수답지 않게 이세돌의 얼굴에선 감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당혹과 환희, 씁쓸함, 체념으로 이행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사람들은 안도하거나 절망했다. 역설적으로 무감동의 기계에 맞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절대고수의 표정 변화는 바둑이 인간의 게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을 보는 나의 관심은 '승부'가 아니다. 기계적인 계산이나 알고리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을 입증하는 것은 승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닐 수 있겠지만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넘볼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하여 영역을 확장할 것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승부에서 이기는 날이 오더라도 인간의 영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술은 기술의 길을 가고, 인간은 인간의 길을 간다.


장병원·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