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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시장의 기원

바람아님 2016. 3. 25. 00:29
국민일보 2016.03.24. 17:45

“할머니, 들어와서 좀 앉아 있다 가요.”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 정육점 청년이 가게 밖에서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며 서성이는 할머니를 부른다. “나 고기 안 살 거야.” “글쎄, 괜찮으니까 여기 의자에 와서 좀 앉아 있어 봐요.” 청년이 성화를 한다. “왜?” “가게 안에 손님이 있어야 그걸 보고 다른 손님이 들어온다니까. 할머니 다리 아플 텐데 쉬었다 가요.” ‘찌개용 돼지고기 3근 만원’이라는 푯말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나를 붙잡고 가게에 앉아 있다 가라고 할까 봐.

시장에 갔다. 마트도 아니고 슈퍼도 아니고 시장. 골목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마다 주인이 다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성가시게 불러 세우는 곳. 참기름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뒤섞이듯, 걷다 보면 반드시 골목 두 개가 만나는 교차로가 나오는 곳.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무엇을 사러 왔는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곳. “이거 나한테 어울려요?” 손수레에 잔뜩 쌓여 있는 옷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티셔츠를 몸에 대보며 나에게 묻는다. 내가 머뭇거리자 다른 손님의 물건을 비닐봉지에 넣어주던 주인아저씨가 소리친다. “아, 그런 건 남자에게 물어봐야지! 예뻐요, 예뻐. 뭘 입어도 예쁘겠구먼!”


돼지고기 세 근을 사가지고 오면서, 아마도 시장이란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모여드는 장소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일들을 이야기했을 것이고, 처음 본 여자와 남자가 눈길을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집에서 만든 물건들을 서로 자랑하고 구경하다가 필요한 물건을 맞바꾸기도 했을 것이고.

기원이 그러하다 해도 시장은 이제 그런 곳은 아니다. 오늘날의 시장은 수요와 공급과 가격이 거론되고, ‘좋다, 나쁘다, 불안하다, 상당히 긍정적이다’라고 묘사되는, 심지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이다. 장사하다가 말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낄낄거리는 사람들이 끼어들 자리는, 그곳에 없다.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