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헝거게임' '엑스맨' 같은 블록버스터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같은 아트 무비를 드나들며 활약 중인 제니퍼 로런스의 '출연료 남녀차별 발언' 역시 할리우드에 남녀 불평등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것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작년 내 주변 사람들이 많이 쓴 신조어 중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가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한 단어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 신조어는 뉴욕타임스 2010년 올해의 단어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2014년 옥스퍼드 온라인 사전에도 올랐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자기들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인 레베카 솔닛은 파티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최근 자기가 '아주 중요한 책'을 읽었다며 떠들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책이 아니라 그 책의 서평을 읽은 것에 불과했다. 참다못한 솔닛과 친구가 남자가 말한 '아주 중요한 서적'의 저자가 바로 그의 앞에 서 있는 솔닛이라는 걸 분명히 밝힌다. 흥미로운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남자는 솔닛의 얘길 듣고도 장광설을 멈추지 않는다. 왜? 자기 말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맨스플레인'은 모든 남자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남자 대부분은 자신이 그런 부류는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가 여자라면 "나는 피해자와 생존자에 대해서 말하려고 할 때마다, 폭력을 저지른 자에게도 공감해보라는 주문을 받는 것이 이제 진저리가 난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솔닛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이 글이 결국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녀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과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 선상의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일부 남자들은 솔직히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아니면 현실의 시체나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범인을 논하는 문제부터 방관자 남성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문제로 대화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 여성은 격분해서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여자를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고 상이라도 받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며 산다. 때로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흔히 페미니즘과 여성해방 운동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남성의 힘과 권리를 침해하거나 빼앗으려는 시도로 오해되곤 했다. 전략상 페미니즘을 자발적으로 오독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솔닛의 표현에 따르면 "한 번에 한 성(性)만 자유와 힘을 누릴 수 있는 암울한 제로섬 게임인 것처럼"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함께 자유인이 되거나, 함께 노예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 아홉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다가 절망, 어둠, 비관 같은 단어를 자주 떠올렸다. 이 책에서 내 마음을 가장 잡아끈 건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된 솔닛의 에세이였는데, 특히 그녀가 어둠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 더 많은 것을 보는 것, 선입견은 놓아두고 가볍게 여행하는 것, 눈을 활짝 뜨고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작가들과 탐험가들이 할 일이다."
어둠의 가치는 무엇일까? 모르는 것을 찾아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일의 가치는 또 무엇일까. 솔닛의 표현대로 이런 어둠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는 본질적인 미스터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우리 시대의 논픽션은 픽션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을 만한 방식으로 점점 더 픽션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한 가지 이유는 과거도 여러 측면에서 미래와 마찬가지로 어두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들이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자기 자신이든 자기 어머니든 다른 유명인이든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위기나 다른 문화에 대해서 진실하게 쓴다는 것은 드문드문 존재하는 어두운 부분과 역사의 밤들과 미지의 장소들을 거듭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모른다. 여자는 남자를 모른다. 여자도 여자를 모르고, 남자도 남자를 모른다. 우리는 우리를 잘 모른다. 안다고 믿는 순간, 어둠은 우리를 덮치듯 다가와 종종 많은 것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 말을 소설가 김연수 식으로 말하면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와 오해, 한계와 가능성, 약점과 결점, 그 모든 것의 양쪽 극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남성과 여성을 넘어 인간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맨스플레인'의 다른 말은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는다!'인 것이다. 무섭거나 두려워서 막든, 황당하고 기막혀서 막히게 하든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간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레베카 솔닛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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