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6.22 김신영 경제부 기자)
얼마 전 대출을 알아보려고 은행에 갔다.
은행 직원이 주택청약저축 가입을 권하기에 사양했다.
"집 살 계획은 없고 마이너스 통장 쓰는 처지라…." 은행 직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 평생 빚 못 갚으신다"며 상담을 하자고 했다.
"적금으로 우선 몇 백만원이라도 모으세요. 그다음에 그 돈으로 마이너스 통장을 갚아 나가세요."
그럴 듯하게 들렸지만 결국 빚내서 적금 들으란 얘기였다. 대출금리는 예금 금리보다 언제나 높다.
바로 이 예금·대출금리 차이로 은행이 먹고산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이 예금하라고 황당한 설득을 한 것이다.
지난달 만난 한 의사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을 했다.
어깨가 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이런저런 검사비가 55만원이라고 했다. 너무 비쌌다.
난감해하는 티가 났는지 의사가 씩 웃었다.
"실손보험 있잖아요. 오늘 30만원, 내일 25만원씩 (검사를) 하면 돼요." (실손보험금 하루 지급 한도는 30만원이다.)
보험금을 최대한 타낼 작전을 의사가 직접 짜주는 게 거북했다.
이틀 동안 검사받을 정도로 아프지 않아서 그냥 나왔다.
다들 먹고살기 어려워서인가. 이런 '무서운 전문가'들과 맞닥뜨리는 일이 잦아졌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번듯한 사무실에 앉아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무지몽매한 이들을 꼬드긴다.
나쁜 전문가들의 폐해는 어수룩한 월급쟁이를 현혹하고 실손보험 같은 제도를 좀먹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국가 경제를 휘청거리게 한다.
부실 조선사를 둘러싸고 지난 수년간 벌어진 일이 대표적이다.
최근 발표한 감사원 보고서에 담긴 행태는 타락한 전문가의 '팀플레이 교과서'를 연상케 한다.
회계팀이 조(兆) 단위 분식 회계를 하고 회사 임원은 이를 근거로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시수 연동비' '총투입 시수' 같은 난해한 수치를 잘 버무려 원가를 조작하는 일은 선박 전문가의 솜씨다.
대주주인 국책은행과 '심판'을 맡은 회계 법인은 눈을 감는다.
이들의 무책임과 방종 탓에 배(船) 구경 한 번 못한 국민의 주머니가 털릴 판이다.
곪을 대로 곪은 조선업, 무고한 희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사건, 할 말을 잃게 하는 법조 비리 등 최근 잇따라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환부(患部)엔 어김없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전문가가 똬리를 틀고 있다.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지식을 제 잇속 챙기거나 부조리 덮는 데 쓰는 나쁜 전문가가 사회를 썩게 한다.
타락한 전문가의 '전설'은 미국 버나드 메이도프다.
그의 이야기가 최근 미국서 드라마로 나와 다시 화제가 됐다.
교활한 수법으로 투자자를 속이고 75조원을 사기 친 메이도프는 2009년 150년형을 선고받았다.
담당 판사가 재판 날 새벽까지 쓰고 고쳤다는 판결문이 먼 나라 일 같지 않게 읽힌다.
'서류 위에서 시작된 냉혹한 사기가 일반인의 피해로 이어졌다.
당신이 파괴한 건 사람들이 당신에게 준 믿음이었다. 지독하게 악랄한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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