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0.06 이선민 선임기자)
독일 철학자 칸트는 만년에 평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혁명과 뒤이은 혁명전쟁 등 초대형 사건들을 주시한 그는 1795년 '영구평화론'을
발표했다. 70대의 칸트는 고뇌와 갈망이 온축된 저서에서 유사 이래 인류를 괴롭혀온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국가 간의 평화 동맹과 연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인간의 이성과 세계시민의식에 관한 낙관론에 기초한 노(老) 철학자의 호소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20세기 들어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후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이 탄생하는 이론적 토대가 됐다.
칸트보다 150년 앞서 살았던 영국 사상가 홉스는 평화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종교 갈등으로 인해 계속되는 내전을 경험한 그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비관적 인간관을 가진 그는 평화란 곧 개인의 안전이며 이는 무력을 독점하고 강력한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홉스의 평화론은 국내 문제에 초점을 맞췄지만 안보를 평화의 핵심 요소로 보는 시각은
국제 문제에도 적용돼 오랫동안 현실 국제정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남북 분단 이후 우리의 대북 정책도 칸트적 관점과 홉스적 관점이 엇갈려 전개돼 왔다.
대화와 화해 노력은 칸트적 이상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은 대북 원조와 호의가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불러올 것이라는 민족적 신뢰가 더해져 추진됐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터지는 군사적 긴장과 충돌은 홉스적 현실론을 상기시켰다.
특히 국제사회의 제재와 남쪽 동포들의 규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한반도가 홉스 시대의 영국보다
더한 위험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안보 위험은 이제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대한민국 일각에는 미국과 북한의 평화협정을 북핵 위기의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 핵무기는 미국의 위협 때문이니 북한의 체제 존립을 보장하면 풀릴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구평화론'에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북한은 칸트적 관점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칸트는 평화의 대전제로 관련국들이 '공화국'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나라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화국'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칸트적 방식에 의한 한반도 평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미국의 국제 문제 전략가인 로버트 케이건은 2003년 펴낸
'낙원과 힘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유럽은 칸트적 세계에 살고 있고, 미국은 홉스적 세계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분쟁의 해결에서 이상주의적인 유럽이 협상과 협력을 선호하는 반면 현실주의적인 미국은 힘을 선택하는 경향을
지적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남짓 지난 지금 인류 역사상 칸트적 세계에 가장 가까이 갔던 유럽조차 IS의 계속되는
테러 등으로 홉스적 세계로 회귀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 세계에서 가장 홉스적인 지역이라고 할 한반도에 살면서
칸트적 인식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대책 없는 관념론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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