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1.17 양상훈 논설주간)
지금 우리 대통령제는 '불행 대통령' 생산 공장… 누가 해도 마찬가지다
'개헌하고 조기 大選' 정치 일정만 제시돼도 이 사태 극복된다
미국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 있다.
미국 기업인들이 하기 시작했다는데 오바마 대통령도 종종 언급한다.
특히 과거 코카콜라 회장 한 사람이 회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직원들에게 "위기를 낭비하지 말자"고
독려해 상황을 반전시킨 사례가 유명하다고 한다.
코카콜라는 당시 회사의 풍토와 구조, 직원들의 고정관념을 전부 바꿔 세계 일류 회사로 거듭났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위기는 어떻게 생각하면 쉽게 만날 수 없는 위기다.
이런 대통령이 등장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어느 이상한 가족과 40년을 얽혀 나랏일까지 분탕질 친 것도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다. 분노한 시위대가 100만명 가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초등학생까지
화가 난 것도 희귀한 일이다. 대통령 한 사람의 스캔들을 넘어서 정부 전체가 통째로 마비되고 공무원들이 일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는 것도 유례가 드물다.
만약 누가 지금의 이 위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보려 한다면 그가 신(神)이라도 힘들 것이다.
돈으로 치면 수백조원을 들여도 만들기 힘들다.
적절한 말은 아니지만 '소중한' 위기다.
우리는 이런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다. 어느 때는 위기를 낭비하지 않고 약(藥)으로 삼았다.
1950년 6·25전쟁,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1997년 외환 위기가 그렇다.
전쟁 이후 우리는 한·미 동맹을 얻고 국력 신장에 매진했다. 6월 항쟁은 6·29 선언과 민주화를 낳았다.
외환 위기는 우리 경제가 이만큼이라도 글로벌화되는 기초가 됐다.
하지만 우리는 역대 대통령 말년에 어김없이 맞이한 정치 위기, 국가 위기는 전부 낭비해 왔다.
낭비했기 때문에 '100% 불행 대통령 법칙'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의 이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한국이 대통령제를 시작한 이후 60여 년간 쌓이고 쌓인 역사적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까지 정말 역대 대통령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임기 말년에
엉망이 됐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까지 그 대열에 들어가 '100%'라는 놀라운 확률을 완성했다.
초년에는 하늘의 새를 떨어뜨리다가 말년엔 아무나 밟고 다니는 낙엽이 되는 '한국 대통령의 법칙'은 100% 적용되는
'완전 법칙'이다. 수학 법칙 말고는 어디에도 없을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통령이 누구냐의 문제일 수만은 없다.
지금의 이 대통령제는 한마디로 '치매' 상태에 왔다. 시쳇말로 제도가 벽에 ×칠하는 상황이다.
이번의 이 위기도 그냥 흘려보내 낭비하고 현 제도를 계속 뒤집어쓰고 가면
다음 대통령 역시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라고 100% 장담한다.
한국 대통령제는 불행한 대통령 생산 공장이다.
알면서도 고치지 않으면 게으른 게 아니라 나쁜 것이다.
흔히 우리 대통령제를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한다. 정확하지 않다.
국회를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절름발이 제왕'이다. 그래서 더 심각하다.
국회를 통해야 하는 국정은 막혀 있는데 다른 문제들, 예컨대 검찰권은 제왕적으로 휘두른다.
기업들이 급조된 재단에 몇백억, 몇십억을 내놓은 것은 검찰 수사를 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은 정책에서는 이름뿐인 왕이고 검찰권으로 겁주고 인사권으로 전횡하는 데는 진짜 제왕이다.
그 반대가 돼야 한다. 정부가 국정은 소신대로 펼 수 있어야 하되 검찰권 인사권 등은 견제되고 분산돼 사적(私的)으로
휘두르지는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랬다면 최순실 국정 농락은 설사 있었더라도 훨씬 축소됐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2선 후퇴조차 거부한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합리적 대화가 어렵다.
그래도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사태나 탄핵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나라가 앞으로 1년여를 이 상태로 갈 수는 없다.
대통령은 안 물러나겠다는데 새 정부는 빨리 구성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개헌은 이 모순도 해결할 수 있다.
개헌은 박 대통령 뜻과 상관없이 할 수 있고, 개헌하면 박 대통령 뜻과 상관없이 임기를 단축할 수 있다.
1987년 개헌으로 대통령 임기가 단축된 전례도 있다.
여야 정치권이 개헌 국민투표를 언제까지 끝내고 그에 따른 대선으로 새 정부가 언제 출범한다는 분명한 정치 일정을
제시하면 그 자체로 이 위기는 끝난다.
박 대통령 명예도 최대한 지킬 수 있고 국민도 수용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치매 걸린 한국 대통령제도 바꾸고, 박 대통령 임기도 폭력 사태나 불행한 일 없이 단축할 수 있는 길이 이렇게 분명히 있다.
이 방안에 동의하는 여야 정치인도 적지 않다.
문제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다.
이대로 가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개헌과 같은 변수가 생기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개헌은 문 전 대표는 물론이고 다른 정치인들에게도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다.
대선 시기가 내년 12월에서 상당히 앞당겨질 뿐이다.
현명한 국민은 위기가 오기 전에 대비한다.
그렇지 못했다면 닥쳐온 위기라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훗날 지금의 이 부끄러운 사태를 우리는 전화위복으로 만들었다고 회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저력이 있는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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