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며 지난 8월 말 들렀던 흑산도가 생각났다. 한국 해양생물학의 고전인 『자산어보(현산어보)』를 완성한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의 자취를 찾아 나섰는데, 그곳에서 뜻밖의 ‘귀인’을 만났다. 면암(勉菴) 최익현(1833~1906)이다. 면암은 1876년 일제가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병자수호(강화도)조약에 반발해 “차라리 내 목을 먼저 쳐라”라며 광화문 앞에서 ‘도끼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사건으로 절해고도 흑산도로 유형을 떠나게 됐다. 유배지에서도 서당을 열고 후학을 키우는 선비정신을 잊지 않았다.
면암은 조선 500년을 대표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다. 흑산도 천촌리 바위에 그가 직접 쓴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 여덟 자도 그렇다. ‘기봉’은 중국 기자가 봉한 땅, ‘홍무’는 중국 명나라 태조의 연호를 뜻한다. 유학자 면암의 사대주의 측면이 도마에 오르는 구실이 됐지만 이 땅, 이 나라가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충절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위정척사의 한계일 수 있다.
반면 면암은 원칙과 명분을 생명보다 아낀 보수의 아이콘이었다.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며 고종이 실권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4세 고령에도 직접 의병을 일으켰다. 의거가 실패하며 일본 쓰시마(對馬島)로 끌려갔는데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하다가 결국 적지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를 기리는 흑산도 유허비(遺墟碑)는 현재 250년 된 소나무 보호수가 지키고 있다.
지난여름 흑산도를 안내했던 버스기사의 말이 기억난다. “순암, 면암 두 선생님 덕분에 흑산도가 빛난다. 자부심을 갖고 산다”고 했다. 벌써 한 달을 훌쩍 넘긴 ‘박근혜 게이트’ , 한국 보수정치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원칙을 내팽개친 권력과 그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문 참모들을 꾸짖을 기운도 이제 거의 없다. “내 목을 쳐라”라던 140년 전의 당당한 외침에서 다시 힘을 내본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