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2.09 최유식 국제부장)
이탈리아 정치는 고비용·저효율 측면에서 기록적이다.
2012년 제정된 혼외 자녀의 법적 권리에 관한 한 법안은 발의부터 의회 통과까지 1300일이 걸렸다.
꼬박 3년 반이다.
상원 315명, 하원 630명 등 945명이나 되는 의원 숫자는 세계 최고로 꼽힌다.
이탈리아 인구의 5배나 되는 미국(상·하원 535명)보다 배가 많다. 1인당 2억원 전후인 의원 연봉을
포함해 한 해 의회가 쓰는 세금도 90억유로(약 11조원)에 달한다. 이런 값비싼 비용을 쓰고도
정치는 늘 불안정해 1948년 공화국 출범 이후 68년 동안 63번 정부가 바뀌었다. 거의 1년에 한 번꼴이다.
지난 4일 치러진 이탈리아 국민투표는 이런 정치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개헌안을 놓고 찬반을 물었다.
이탈리아는 상·하 양원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완전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양원이 모두 동의해야 법안이 통과되는 만큼 속도가 한없이 느리다.
법안이 1년 내에 처리되면 빨랐다는 말을 들을 정도라고 한다.
집권당이 양원 모두 과반수를 확보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정당 10여 개가 난립한 이탈리아 현실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낙후한 정치 구조가 유로존 3대 경제국 이탈리아를 재정 위기 당사국인 그리스·스페인 수준의 '병자(病者)'로 만들었다.
마테오 렌치 총리의 개헌안은 상원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사실상 하원 중심의 단원제로 가자는 방안을 담고 있다.
상원 의원 수를 315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유급을 무급으로 전환하면서, 입법권도 영토 분할 등에 관한 사항 등으로
국한하자는 것이다. 정치의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20% 가까운 압도적 표차의 부결이었다.
2014년 39세에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한 렌치는 의욕이 넘쳤다.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중도 좌파 민주당(DP) 소속이지만, 침체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근로자 해고 요건을 완화했고
소득세를 낮췄다. 독일의 슈뢰더식 개혁을 도입한 것이다.
타임지 인터뷰에서는 "이탈리아 경제를 10년 내에 유럽 1위로 올려놓겠다"고 호언했다.
이런 렌치가 노동 개혁보다 더 공을 들였던 게 정치 개혁이었다.
한 국가의 정치 시스템과 권력 구조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명분과 시대정신이 있어야 하고, 변화를 이끌어 낼 정치력과 시운(時運)이 필요하다.
렌치의 개헌안은 이탈리아의 만성병을 치유할 만한 처방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치 기득권층과 실업난에 시달리는
청년층의 반발을 넘지 못했다.
21년 무솔리니 독재의 트라우마를 가진 국민은 권력 집중을 우려했다.
개헌안이 국민 60%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던 집권 초 좋은 시기도 놓쳤다.
그는 패배가 확인되자 미련 없이 총리직을 던졌지만, 이탈리아에는 다시 대혼돈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는 등장인물만 바뀌었을 뿐 역대 정권 때마다 있었던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설령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난다 해도 성취감보다는 착잡함을 느낄 국민이 더 많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우리 사회가 한 발짝 나아갔다고 하려면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만드는 개헌이 절실하다.
당장 쉽지 않다면, 다음 정부에서라도 집권 초부터 개헌 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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