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시론] 국가 정체성마저 흙탕물에 처박을 수는 없다

바람아님 2016. 12. 13. 09:53

(입력 : 2016.12.13 한희원 한국국가정보학회 회장)


2010년 12월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못 구해 노점상을 시작한 튀니지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경찰의 단속에 

항의해 분신(焚身)했다. 시민들은 국화(國花)인 재스민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벤 알리 대통령은 축출됐고 재스민 향기는 중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집트·리비아·예멘 정권이 잇달아 무너졌다.


세계는 아랍의 봄을 기대했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이집트는 다시 군부독재로 돌아갔고, 리비아는 분열되면서 파벌 무장 조직들이 할거했다. 시리아는 장기 내전으로 

엄청난 난민이 발생했다. 

급기야 온갖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괴물 테러 조직 이슬람국가(IS)가 탄생했다.


재스민 향기가 어쩌다 이런 괴물의 탄생으로 귀결됐는가? 

국제 정세를 통찰하는 진정한 정치 지도자는 없고 유토피아를 가져다줄 것처럼 거짓과 선동을 일삼는 정치꾼들이 문제였다. 

여기에 시민의식이 실종된 일부 시민의 방종적 자유가 가세했다.

정치인들의 거짓과 선동은 책임의식을 실종시켰고, 허황된 약속은 근로의식을 저감시켰다. 

국가 경쟁력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국가 기능은 상실돼갔다. 

국가 행동 계획이나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이념 분쟁만 격화시켰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희망으로 시작했던 아랍의 봄이 황폐화로 막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 DB


재스민 혁명의 실패는 도둑을 피하려다 강도를 만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거리와 광장의 함성은 결코 주권과 동격이 아니고 성냄만으로는 국가 존립이나 국민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음도 일깨운다. 

재스민 악취가 최순실 게이트를 풀어야 할 우리 정치권과 사법부·언론·시민사회에도 스며드는 것 아닌지 두렵다. 

구정물 치운 자리를 흙탕물로 채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작금의 사태에 대해 대통령 개인은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과반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던 국가 정체성마저 흙탕물 속에 처박아선 안 된다.


국제사회에서 현 정부의 대북 정책이 높은 평가를 받고 김정은 독재 정권은 심각한 내상을 입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수의 엘리트 탈북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박 대통령을 앞세워 우리가 지키려고 한 것은 안전한 자유 대한민국이다. 

극악무도한 인권유린을 자행하면서 핵전쟁을 위협하는 김정은 정권으로부터 지켜내려는 가치는 바로 진정한 평화와 자유다. 

따라서 후임 정부가 개성공단 재개, 사드 배치 철회, 북핵 용인, 서해북방한계선 북한에 양도, UN 북한인권결의에서의 

태도 변경, 유엔 결의안을 위배한 대북 원조 등을 할 것이라면 더 엄청난 국가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역사는 말한다! 소란을 더 소란스럽게 만드는 자는 민주주의의 영원한 적이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는 도편추방제로 그런 거짓 선동꾼을 10년간 추방했다. 

아가사창(我歌査唱)이라는 옛말처럼 꾸짖음과 나무람을 들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먼저 큰소리를 내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거리의 단죄가 아니라 국민 각자 제자리를 지켜 정치권의 행보를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 

특검이나 여의도는 성난 민심에 편승해 정치 칼춤을 출 일이 아니다. 

현명한 주권자는 자기의 결점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 비난에만 열 올리는 이단공단(以短攻短)의 목소리를 차버리는 

냉철함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