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2.10 박은주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박은주)
#1. 떡집 주인이 사무라이를 찾아왔다. 사무라이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는 것이다.
어린 아들은 먹지 않았다고 했다. 사무라이는 칼을 들어 아들 배를 갈랐다.
떡이 나오지 않자 사무라이는 떡집 주인 목을 치고 자기 배를 그어 자결했다.
(김소운 '목근통신')
#2. 세종이 아꼈다는 조선시대 문인 재상 윤회(尹淮)가 젊어 여행길에 올랐을 때 일이다.
여관 주인이 방이 여의치 않다 하여 뜰에 앉아 있었다.
주인의 아이가 진주(眞珠)를 갖고 놀다가 떨어뜨리자 곁에 있던 거위가 진주를 삼켜 버렸다.
주인은 윤회를 의심하여 묶어두고, 날이 밝으면 관아에 고발하기로 했다.
윤회는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거위 뒷구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이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 묻자 윤회가 말했다.
"어제 말했다면, 주인장은 필시 거위 배를 갈라 구슬을 찾았을 것 아니오." (이긍익 '연려실기술')
일본 무사와 조선 선비는 생각하는 방식과 처리하는 방법, 속도도 다 달랐다.
사무라이 태도에서는 염결(廉潔)함에 대한 숭배가 느껴진다. 속전속결 장엄미는 짜릿하다.
그런데 그게 '사람 셋의 목숨'을 바칠 일인가 의문이 남는다. 얻었지만, 잃었다.
짧은 굴욕을 견디며 미물의 생명조차 아낀 선비의 방식은 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본다. 만일 거위를 중간에 잃어버리기라도 했다면, 선비는 누명을 벗을 길이 있었을까.
혹여 선비가 자기가 훔친 진주를 거위에게 먹인 후 다음 날 '인격자'인 듯 군 것이라면?
'유예(猶豫)된 정의'는 때로 정의와 어긋난다.
대다수 국민과 국회는 최순실의 국정 농단과 박근혜 대통령의 문제를 푸는 길로, 탄핵이라는 속결(速決)을 택했다.
대통령이 무고(無辜)하다고 믿는 이는 적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의 유죄(有罪)판결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 지지자들은 '무죄 추정 원칙을 잊고 광장의 주장에 꿇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대통령의 '형사상 유죄판결'을 근거로 할 필요는 없다.
현직 대통령은 형사상 소추가 면제되니, '대통령의 유죄'를 근거로 삼는 건 불가능하다.
지지자로서는 억울해도 그게 법이다. 대신 그 법은 대통령 탄핵을 사법부가 최종 판단토록 했다.
유죄판결 없이도 상·하원이 대통령을 탄핵(impeachment)하는 미국보다는 좀 더 엄격하다.
밥이 서는 이유는 뜸들이는 1~2분을 못 참기 때문이다.
엄정한 무사가 너그러운 선비 마음을 갖기도 쉽지 않다. 그 조짐이 보인다.
탄핵안 가결 직후부터 인터넷에는 '박근혜 당장 구속' 구호가 터져 나온다.
공안 검사 출신답게 "북한 도발 가능성 높다"고 일성(一聲)을 내놓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해서도
'물러가라' 목소리가 커지고, '대통령에게 부역한 내각도 다 사표 내라'는 압박도 나온다.
헌재 재판관들에게도 '빨리 결과를 내놓으라'고 닦달할 것이다.
'단숨에 다 쓸어버리자'는 광장의 목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밝혀내는 데 거의 기여하지 않고도 '의문의 1승'을 얻은 야당에 할 일이 생겼다.
선로에 오른 탄핵 열차가 어느 역에 기착할지, 국민이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을 광장에 알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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