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매섭고 간간이 비도 뿌립니다. 전형적 영국의 겨울 날씨입니다. 엘(L) 두 개로 시작하는, 현지인들도 주저하면서 발음하는 지명의 북웨일스 소읍입니다.
여느 마을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전쟁 추모시설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있다는 점에섭니다. 양차 세계대전은 물론 한국전에서 싸운 희생자도 기립니다. 사실 영국인들은 영국인(브리티시)이란 개념이 약합니다. 애국심보단 애향심입니다.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면 좋을 듯합니다. 프로도가 목숨을 건 건 자신의 마을 샤이어를 지키기 위해섭니다. 그 결과 중간계도 구하게 되지요. 영국인들의 정신세계입니다. 군 편제도 이를 감안했답니다. 마을 단위이곤 했습니다. 여긴 북서웨일스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희생자들이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뉘 집 아들’이곤 했습니다. 추모가 절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걸었습니다. 마을의 이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때 석회석 광산이었고 루이스 캐럴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영감을 받은 곳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이들의 생사도 알게 됐습니다. 해변의 벤치는 애니 부스란 여성이 62년간의 결혼 생활 후 세상을 떴고 남편 리처드도 곧 뒤따랐다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자손들은 “이제 둘은 함께 이곳을 즐긴다”라고 새겼습니다.
3년 전 영국을 찾을 때만 해도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들, 처칠·대처 정도를 알았을 겁니다. 이젠 아서가 전설적 잉글랜드 왕으로 차용됐지만 실존했더라도 웨일스인일 거라고 여깁니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10년 가까이 배급제를 했을 정도로 어려웠다는 것, 그럼에도 히틀러에게 맞선 유일한 국가였던 절체절명의 시기를 ‘가장 좋은 날(the finest hour)’로 간주한다는 것도 깨닫게 됐습니다.
영국은 이렇듯 이런저런 장치를 통해 끊임없이 과거를, 앞서간 이들의 존재를 일깨웁니다. 맥락입니다. 또 이해와 긍정입니다. 이방인에게도 뚜렷할 정도로 말입니다. 뉴턴이 언젠가 말했습니다. “내가 좀 더 볼 수 있었던 건 거인들의 어깨에 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답지 않게 겸손한 때가 있었나 했습니다. 이제는 이곳의 바탕 정서란 걸 압니다.
이에 비해 우린 극단적으로 현세적입니다. 치열하지만 맥락을 잃기 십상입니다. 불만이 우리를 끓어 올리는 힘이지만 불행하다고 여기는 상시적 스트레스에 노출되곤 합니다. 이제 다시 두 세계를 가로지릅니다.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바람이 찹니다.
고정애 런던특파원
'時事論壇 > 橫設竪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갑식의 세상읽기] 언론의 亂 (0) | 2017.01.21 |
---|---|
[천자 칼럼] 교토 니조성 (0) | 2017.01.20 |
오바마 "8년간 나를 지켜준 책은 셰익스피어" (0) | 2017.01.18 |
[유레카] 달콤한 덫, 치명적 유혹 / 조일준 (0) | 2017.01.17 |
[세계의 창] 일본 국력이 한국보다 강해지는 이유 (0) | 2017.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