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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요일에 보는 경제사]'강아지 사또'까지 만든 천태만상 '매관매직'史

바람아님 2017. 1. 23. 01:03
아시아경제 2017.01.20 10:34
(사진=AP/뉴시스)


조선왕조 말기, 충청도 한 고을에 '강복구'라는 이름의 사또가 있었는데 이 사또는 사실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였다. 과부가 된 돈 많은 퇴기가 기르던 개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또가 됐고 과부는 복구에게 감투를 씌워줬다.


집에서 뒹굴던 강아지를 사또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매관매직제도. 당시에는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동네 부잣집에 일단 아무 벼슬이나 내린 후에 돈을 강제로 받아가는 매관매직제도가 유행했다. 동네 사람 모두가 복구네 집이라 하니 복구를 강아지가 아닌 집주인으로 착각했던 것. 결국 존재하지도 않는 강복구를 사또로 일단 임명시킨 후 5000냥을 받아갔다.


이 강아지 사또 이야기는 조선말기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런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비롯해 왕조시대의 매관매직제도는 그 역사가 매우 길다. 보통 망국의 조짐 중 하나로만 알려져있지만 매관매직은 장기간 전쟁이나 흉년이 발생해 세수가 줄어들면 재정문제 타개를 위해 항상 행해지던 제도였다.


동양에서는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후인 기원전 3세기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나라시대에 들어와 매관매직제도가 고착화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소설 삼국지(三國志)의 시작 배경이 되는 후한 영제(靈帝)때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다. 원래 상인이 꿈이었다는 영제는 관직 정가제를 실시하고 후불제도를 만드는 등 기발한 벼슬장사에 나섰었다. 측근 환관들인 십상시(十常侍)들까지 동원해 활발한 매관매직 활동을 벌였다.

후한 영제 때 매관매직에 앞장섰던 십상시 모습(사진=위키백과)


주요 벼슬자리 가격은 지방 태수가 2000만전, 현령이 400만전, 중앙 고위직이 1000만전 등이었다. 중앙 고위직보다 지방 태수가 더 비싼 이유는 지방 태수들에겐 조세 징수권이 있어서 돈을 모으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없으면 후불로 2배 가격을 내면 됐다. 여기에 어음도 받고 담보도 받았다. 현직 태수직들에게도 다시 벼슬을 내려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원래 관직값의 2배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에 관리들은 매우 곤란해했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 입장에서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성의 고혈을 짜서 관직값을 치를 수도 없었기에 많은 지방태수들이 자결하거나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후한 멸망의 서막인 황건적(黃巾賊)의 난은 이러한 황제의 강압적 매관매직과 지방 태수들의 폭정 속에 일어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매관매직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주로 고려시대 중엽 이후부터로 알려져있다. 이른바 문벌귀족 시대가 끝나고 군부가 집권하면서 횡행하기 시작한 매관매직은 고려왕조 말기에 매우 활발했으며 조선왕조 초기에 많이 근절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대규모 전쟁을 겪고 난 이후 재정 문제 타개를 위해 백지 임명장인 공명첩(空名帖)이 남발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발행된 공명첩(사진=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렸던 조선왕조 말기였다. 이때부터는 아예 매관매직제도가 정착이 되기 시작했고 거의 모든 외직은 매매되기 시작했다. 당시 주한 일본 외교관의 기록에 의하면 1866년 시세로 감사는 2만냥에서 5만냥, 부사는 2000냥에서 5000냥, 군수와 현령은 1000~2000냥에 거래됐다고 한다. 작은 고을의 수령·진장을 비롯해 지방의 감사·유수·병사·수사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외근직이 매매됐다. 대략적인 정가는 잡혀있지만 경쟁자가 많을 경우엔 돈을 많이 써야 실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방직 자리는 점점 비싸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고을 수령자리 하나가 3만냥까지 뛰어올랐다.


앞서 강아지를 사또로 만든 제도인 원납전 제도는 경복궁 중건 등으로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던 흥선 대원군 정권에서 본격화됐다. 민간에서는 이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제수받은 반갑지 않은 관직을 '벼락감투'라고 했다고 한다. 원납전에 의해 억지로 관직에 임명되면 관직값을 내느라 가산을 탕진하는 것이 마치 벼락을 맞은 것과 같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 관이 이권을 매개로 상인들과 민간인들에게 돈을 갈취하는 행태는 이처럼 뿌리깊은 연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