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2.23 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꽃이 있다.
장미, 백합, 혹은 안개꽃. 누군가는 샐비어를 좋아한다.
유년 시절엔 꽃을 따서 단물을 빨아 먹곤 했다. 그때는 사루비아라고 불렀다. 추억의 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꽃이 뭐냐고 묻는다면 동백이라고 답한다.
동백에 '필이 꽂힌' 데엔 전남 영광 출신 친구가 한몫했다.
대학 신입생 때다. 하숙 룸메이트가 영광 출신이었다. 낯선 전라도 사투리가 갑자기 일상이 됐다.
가끔은 다른 문화에 불편해하기도 했지만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막 스물을 넘긴 시절이다.
이듬해 2월 전라도 영광 땅을 난생처음 밟았다. 요즈음 세대에게는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난했던 그 시절, 먼 남녘으로 여행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은 금호고속으로 이름이 바뀐 광주고속 버스를 타고 갔다.
차창 너머 보이는 넓은 호남벌은 산간벽지에서 자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친구는 집 근처 안흥사 동백이 장관이라며 나를 끌었다. 그날 본 풍경이 어제 같다.
핏빛 꽃들이 늙은 동백나무를 뒤덮고 있었다. 장엄하다 못해 비감스러웠다.
동백꽃은 사연이 많다. 뇌쇄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긴 세월 천대를 받아 왔다.
꽃봉오리 전체가 어느 순간 '툭' 떨어지는 모습이 불길하다고 해서 지배층의 외면을 받았다.
불길한 일들이 갑자기 생기는 것을 동백꽃 춘(椿) 자와 일 사(事)를 조합해 '춘사(椿事)'라고까지 표현한다.
일본도 비슷하다.
사무라이들은 질색한다.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칼날에 사람 목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해서 아예 마당에 들여놓지 않았다.
서양에서도 장미 못지않게 사연이 많다.
그래서 베르디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운의 여주인공 비올레타 가슴에 동백꽃을 달았다.
동백꽃 소식이 들리면 문밖은 봄이다.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서정주 '선운사 동구' 중에서).
하지만 조숙한 동백은 이미 바람결에 떨어진다. 그날 그곳의 동백꽃은 지금쯤 다시 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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