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시론] 분노 중독에는 빠지지 말자

바람아님 2017. 2. 23. 23:25
중앙일보 2017.02.23 01:21

분노는 유용하나 위험한 감정
그러나 분노 중독에 빠지면
분노가 주인 되는 좀비 신세
분노를 찬양하는 일 삼가야
허우성경희대 철학과 교수
분노의 대한민국, 성난 시민! 한국의 이번 겨울을 단적으로 묘사하는 말이다. 언론들은 촛불시위 보도에서 분노의 자연스러움, 정의로움, 당당함을 들어 수없이 분노를 예찬해 왔다. 많은 사람은 대통령의 법 위반과 국민의 신임에 대한 배신을 고려할 때 분노하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으로 분노가 유용하면서도 위험한 감정임을 잘 알고 있다. 잘 다루면 그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잘못 다루면 증오, 저주, 파괴와 살인, 아니 전쟁의 나락으로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현자가 그 위험성을 지적해 왔고, 우리 언론 역시 최근까지도 분노를 잘 조절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분노의 순기능을 인정한 대표적인 철학자 중엔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는 자신이나 친지가 모욕을 당했을 때 화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 자기방어도 하지 못하는 노예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철학자는 화를 낼 때 다섯 기준은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분노하기에 마땅한 일, 분노하기에 마땅한 상대, 분노의 강도(强度), 분노의 타이밍, 마땅한 지속 시간이 바로 그것들이다. 다섯 기준은 이성에서 온다. 분노라는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잘 유지하면 ‘중용의 성격’을 지닌 자로 칭송받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런데 힌두교·불교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분노에 대해 아주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특히 불교는 분노[진(瞋)]를 무지와 탐욕과 함께 삼독(三毒)의 하나로,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불교의 입장에서는 비록 ‘공분(公憤)’이라고 해도 그것이 증오나 폭력을 초래한다면 거기에 동조하기 어렵다. 1950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동부 티베트로 침공해 온 이후 인도로 망명해 온 14대 달라이 라마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마오쩌둥을 포함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분노 대신 자비를 보낸다고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도 했다.


침략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우리로 하여금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했을까? 변영로의 시 논개(論介)의 첫 소절이 그런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거룩한 분노-궁극적인 자기희생을 수반하는 이런 분노는 촛불 쪽이든, 태극기 쪽이든 찾기 어렵다.


언론들도 분노에 대한 우려가 좀 있긴 있었다. 분노의 승화, 축제, 비폭력 평화, 성숙한 시민이라는 용어가 그 증거다. 물론 용서와 화합보다는 ‘혁명적 정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언론도 있었다. 특히 촛불 민심을 ‘내 것’으로 삼아 대권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은 촛불시위를 촉발한 분노를 가장 인간적이고 순수한 감정으로 부르기도 하고, 시위 참여자를 거룩한 예수에게 비유하기도 했다. 속 보이는 행위다.

분노가 다루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고, 때로는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위장해 사람을 종종 분노 중독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중독은 강박이 돼버린 습관으로 중독에 빠진 사람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분노 중독에 빠지면 분노가 주인이 되고, 분노하는 사람은 좀비처럼 된다. 중독이 된 분노는 우리의 심신에 습관 또는 하나의 정신적 유전자가 돼서 합리적 행위를 방해한다.


분노 중독을 막는 데는 정치인만큼이나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계엄령을 선포하라’거나 ‘○○○를 처형하라’는 구호는 물론 비정상이다. 하지만 쌍욕이 담긴 18원 송금이나 ‘지랄 염X하네’라는 욕설 역시 아무리 통쾌해 보여도 예외이지 정상은 아니다. 정치가나 언론이 후자를 정상 취급하면 시민들은 선동돼 따라 하고, 더 센 저주와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지랄 염X하네’와 ‘처형하라’는 사촌지간이다. 이 모든 욕설과 저주는 치명적 바이러스처럼 온 나라를 전염시켜 공동체 정신을 죽이고 말 것이다.


분노도 사랑처럼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가 저들에게 분노하면 저들도 우리에게 분노하기 쉽다. 분노는 주고받으면서 격해진다. 대통령의 나체 풍자 그림을 두고 생긴 분노와 공격은, 분노와 모욕에 대해 보복한 경우다. 분노 교환이 일상이 된 시민, 적의를 가슴에 품은 정치인, 선정주의에 빠진 언론기관, 이 셋 사이에 무언의 삼각체제가 형성되면 우리 사회 전체가 분노 중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우리나라에 공의가 꿀처럼 흐르게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저 삼각체제를 해체해 사회적 애정(social affection)을 확산시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저들 속에 내재한 분노의 에너지를 개혁 에너지로 전환하고, 안전하게 재배치할 수 있다. 분노의 신하가 돼서 좀비처럼 움직이는 사람은 이미 주권자가 아니다.


탄핵 찬반을 놓고 촛불과 맞불이 격하게 부딪친다. 달라이 라마처럼 서로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면 무골충이라 욕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분노로 일어섰다. 분노가 ‘나’의 성향, 역사적 유산, 사회적 구성의 합작품임을 깨달아 정서적으로 성숙해져서 분노 중독에는 빠지지 말자. 나라의 공의는 결국 우리와 저들이 함께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