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면 ‘봄날은 간다’가 캐럴처럼 울려 퍼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멋들어진 악곡에 가사도 미려하니 1953년 백설희 이후 50여 가객이 불렀다. 황금심 은방울자매 문주란 심수봉 배호 이은하 장사익 이미자 조용필 나훈아 한영애에 신예 말로까지 가세했다. 이 노래에 다른 여러 가수의 노래를 담은 CD까지 있을 정도다. 봄은 이토록 위대하고, 지독하고, 집요하다.
봄날의 치마를 차마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예술가들이다. 꽃향기 날리고, 비 오고, 바람까지 불면 거의 실성을 한다. 예민한 감수성 때문이리라. 오래전, 풍류를 아는 선배가 어디서 밤새 노닐다가 봄비를 쫄딱 맞고 회사에 들어서는 모습을 봤다. 당시 석간신문의 출근시간은 아침 7시였다. 그 선배로부터 문자가 왔다. “봄날 우째 지내노….” 아, 봄이로구나, 먼저 기별을 해야 하는 건데.
약도를 찾아 당도한 곳이 옥인동의 송석원 옛터였다. 1700년대 후반, 단원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의 현장이다. 옥류천 건너 달빛 흐르는 언덕에 9명의 문사가 모여 시회를 가지는 장면. 이후 추사 김정희가 ‘松石園’이라는 바위글씨를 썼고, 친일파 윤덕용이 천장에 금붕어 노니는 아방궁을 지었다가 불에 타 없어졌더니 지금 소담스러운 양옥에 음식점이 들어서 시인묵객을 맞고 있었다.
송석원시사(혹은 옥계시사)는 요즘으로 치면 지역의 문학동인회다. 웃대에 살던 지식인들이 정례 회합을 가지면서 수준급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11년 ‘웃대 중인’전을 통해 이들이 일궈낸 위항문학을 문화운동으로 평가한 바 있다.
장혼의 ‘서옥계사수계첩후(書玉溪社修?帖後)’에서 밝히는 그들의 지향점은 이렇다.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惟文學之交可以永世).”
22항에 이르는 규약은 사뭇 엄하다. “비용을 감당하기 위하여 각기 일정량의 돈을 낸다. 동인들이 사귀는 도리는 솔직하고 실천에 힘쓰며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주어 금란지교를 저버리면 안 된다. 동인들의 시는 책을 만들고 베껴내어 후일의 면목으로 삼는다. 동인들이 정원이나 산수 간에 모여 노는 모습은 그림으로 그려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동인 중 불선한 행동을 한 일이 있다면 경중을 헤아려 벌을 논한다.” 단순히 먹고 마시고 노는 모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산 정약용이 꾸린 ‘죽란시사(竹欄詩社)’의 규약은 양반 계급의 엘리트들이어서 그런지 여유가 있다. “회원들은 봄에 살구꽃과 복숭아꽃 필 때, 여름에 참외가 익을 때, 가을에 연꽃과 국화가 필 때, 그리고 겨울에 큰 눈 내릴 때와 분매(盆梅)가 필 때 모인다.” 도합 일곱 차례.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장만하여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모임은 나이 적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되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했다.
송석원은 당시의 엄격한 신분질서 속에서 진지하고 경건한 의례를 지키면서도 자유분방한 문학의 향연을 펼쳐 보였다. 치열하거나 남루한 일상 속에서도 때가 되면 함께 모여 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날 밤 우리는 송석원 동인들의 낭만을 부러워하며 잡다한 대화를 허공에 뿌리다가 시도, 그림도 없이 셀카로 기록을 남겼다. 봄바람을 맞으며 서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심야에 귀가했다. 봄 타는 중년은 철이 없는 것인지, 철을 아는 것인지. 봄날은 또 그렇게 갔다.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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