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류근일 칼럼] 사드도 '적폐 청산' 대상인가?

바람아님 2017. 5. 17. 09:09

조선일보 : 2017.05.16 03:11

세월호·정윤회 조사에 이어 사드 배치 중단 요구까지
집권 세력 적폐 청산한다며 운동본색 너무 빨리 드러내
그러나 지나침은 禍를 불러… 싹쓸이로 밀어붙이지 말아야

류근일 언론인
류근일 언론인
좀 빨랐다. 운동권 정권이 들어서면 선거 기간의 전술적 중도화(中道化) 방편을 이내 곧 거두어들일 것이란 예측은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운동본색'을 드러낼 줄은 미처 몰랐다. 몰랐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었다는 뜻일까?

세월호 참사, 국정 농단 사건-정윤회 문건 사건 재수사, 국정 역사 교과서 폐기, 그러더니 급기야는 더불어민주당 사드대책특별위원회의 '사드 청문회'와 '사드 배치 즉각 중단' 요구가 나왔다. 벼르고 별렀던 '적폐 청산'을 착착 진행하는 기색이다. '적폐'야 물론 청산해야 하겠지만, 사드가 '적폐'처럼 간주되는 건 문제가 있다. 이런 드라이브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가 향후의 한국과 한반도의 운명을 가름할 것이다.

새 집권 세력의 급속하고도 도전적인 의중(意中) 노출을 이해하기 위해선 운동권 담론이 가진 최고 강령과 최저 강령의 2중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고 강령은 운동권 이데올로기의 속살을 말한다. 사드 문제를 예로 든다면 '사드 배치 절대 반대'가 그들의 최고 강령, 즉 속살이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엔 이 속살을 살짝 감추고 그 대신 겉살만 드러내는 수가 있다. 사드 절대 반대 대신 "문제를 차기 정권으로 미루어 공론화하자"는 투로 음계(音階)를 한 급(級) 낮추는 것이다. 이게 겉살, 바로 최저 강령이다. '필요한 경우'란 대선 기간 같은 때를 말한다. 선거 때는 열성 팬들 외에 뜨내기, 중도, 보수표도 끌어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사드대책특별위원회 심재권 위원장과 김영호 의원(왼쪽.간사), 유승희 의원이 12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불법적인 사드장비 이동배치 등 모든 국민적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국회차원의 청문회 개최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겉살 작전이 먹혀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운동권은 지난 5·9 대선에서 이겼다. 이겼으면 이제부턴 그들의 독판 세상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다시 본연의 최고 강령 즉 '사드 배치 절대 반대' '사드 배치 즉각 중지'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 그들이 집권하자마자 속내를 드러내 "내가 언제 사드 배치를 공론화하자고 했느냐, 당장 중지하고 철회할 일이지"라며 거침없이 소리 치고 나선 것은 그래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변혁 운동-변혁 운동권은 대체로 그래 왔다. 그래도 집권 직후 얼마간은 밀월 분위기가 있을 줄 알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흘이 멀다고, 닷새가 멀다고 집권 측은 화투장을 다 제쳐 보이고 있다. 협치한다더니 왜 그러느냐고? 협치는 본래 집권 도중에서만 있는 것이지, 일단 전권(全權)을 거머쥐었다 하면 그땐 협치고 뭣이고 없다. 그냥 최고 강령대로, 이념적 원칙대로 밀어붙이는 것뿐이다.

밀어붙여 정히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할 경우 그 '갈 데'가 어디일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운동권이 늘 해오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철회, 한·미 합의 취소, 한·미 동맹 파행(跛行). 친중(親中) 노선, 작전지휘권 환수, 한미연합사 해체, 법적 안보 장치 폐지,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 햇볕정책 심화…. 대체로 이런 언저리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집권 측이라 해도 매사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국내외 여건이 한국 운동권 노선의 일방적 질주를 방임할 만큼 간단치 않다. 미국 의회는 '대북제재 현대화법'이란 강력한 법을 마련했다. 개성공단을 열었다간 우리도 걸릴 판이다. 문재인-트럼프가 어긋나면 미국이 한국을 제치고 뜻대로 나갈 수 있다. 국내적으로도 집권 측이 과잉 청산으로 질주하면 자칫 뼈와 살이 맞부딪칠 수 있다.

이래서 집권 측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역대 정권들은 모두 집권 측의 과잉 행동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곤욕을 치르곤 했다. 자유당 말기의 3·15 부정선거, 유신 정권 말기의 긴급조치 1~9호, 5공 말기의 박종철 고문치사 같은 게 그랬다. 최순실 사태 역시 아직 재판은 끝나지 않았지만 지나침을 자제하지 못해 초래한 화(禍)였다. 지나침의 부메랑 효과는 보수 정권들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민주와 진보를 자임하는 정권들에도 해당한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도 가족과 측근의 지나침을 제어하지 못해 끝이 안 좋았다.

오늘의 집권 측인 운동권도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게 센 사람들이다. 정의를 대표한다고 자임하기 때문이다. 이럴수록 매사를 싹쓸이, 새 하늘 새 땅 식으로 밀어붙일 유혹이 있을 수 있다. 집권 측이 그런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한다. 개혁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다만 '궤멸의 정치'는 그걸 하는 쪽에도 이롭지 않으리란 것뿐이다. 고칠 건 고치되 한·미 동맹, 대북 억지력, 국제 공조를 뒤집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4일 만에 김정은은 미사일 도발을 자행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