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와 같이 하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에 있어서는 한 멤버가 된다는 것만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자신의 악기가 연주하는 부분이 얼마 아니 된다 하더라도, 독주하는 부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서운할 것은 없다. 남의 파트가 연주되는 동안 기다리는 것도 무음(無音)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수필 문학사의 거봉(巨峰)인 금아(琴兒) 피천득(1910∼2007)이 1969년에 발표한 수필 ‘플루트 연주자’ 한 대목이다. 평범할 수 있는 소재를 섬세한 감성으로 간결하면서 영롱하게 표현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 그의 명문은 이 밖에도 많다.
‘인연’ ‘수필’ ‘은전 한 닢’ 등이 중·고교 교과서에 실려 더 그럴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고 한 ‘인연’ 속의 표현도 그중 하나다. ‘수필은 청자연적(靑瓷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라고 한 ‘수필’ 시작 부분도 마찬가지다. 현대 수필의 새 지평을 연 그의 작품은 영어·일본어·러시아어 등으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시인·영문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문학과 학문뿐 아니라 삶도 순진무구하고 고결했다. 수녀·시인 이해인이 “산호와 진주로 상징되는 글과 장미 향 가득한 삶 자체로 아름다운 러브레터였다”고 하고, 소설가 조정래가 “이름 있는 문인들이 탈을 만들고, 때가 묻고, 추해져 세상의 반면교사가 될 때도 그는 오롯이 맑고 깨끗한 정면교사(正面敎師)였다”고 추앙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타계 10주년 기일(忌日)인 오는 25일을 앞두고 정정호 중앙대 명예교수가 ‘피천득 평전 -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의 이야기’를 펴냈다. 그의 첫 평전을 반기며, 또 하나의 명작 수필 ‘오월’의 이런 대목도 떠올리게 된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김종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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