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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못말리는 수컷 본능… 다만 동반자와의 의리는 지켜다오

바람아님 2017. 5. 28. 13:26

조선일보 : 2017.05.27 03:02

[이주윤의 너희가 솔로를 아느냐]
술 취해 혀 꼬인 목소리로 말 걸어오는 유부남들…
우렁차게 대답했을 결혼 서약은 잊은 건가?
금은보화 다 필요 없으니 변치 않을 믿음만 준다면 나도 평생을 약속할 텐데

술에 취한 남자 눈에는 추녀도 미녀로 보인다 했다. 그래서인가. 술집에만 가면 눈이 게게 풀린 남자들이 혀 꼬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저기여어! 혼자 오셔쒀여? 너어어어어무 아름다우셔서 제가 술 한잔 사고 시픈데 맥쭈 갠차느세여 맥쭈우?" 보잘것없는 쇤네에게 관심을 다 가져 주시니 황송할 따름이지만,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나는 모르는 남자의 알은체가 전연 달갑지 않다. 속마음을 조금만 더 털어놓아 볼거나? 못생긴 남자가 수작을 걸면 '어허, 그 얼굴로 감히 어딜!' 하는 생각이 들고, 잘생긴 남자가 후리려 하면 '에이그, 그 잘난 얼굴로 할 짓거리가 이것밖에 없냐'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누구이건 그 나물에 그 밥 같아서 '하여튼 남자들이란!' 하며 콧방귀를 뀌게 된다는 말이다.

[Why]
일러스트=이주윤
남자 친구보다 남편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어버린 나는 "저 유부녀예요" 하는 거짓말로 퇴짜를 놓아버린다. 남자들 반응은 그들의 생김새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그러시구나. 전혀 그렇게 안 보이셔서요." 순순히 물러서는 남자. "누가 연애하재요? 그냥 얘기나 하자는 건데요, 뭘." 쿨한 척하는 남자. "아줌마가 왜 이런 델 와요? 집에 들어가서 밥이나 하세요!" 화를 내는 남자.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뜨악하게 했던 남자는 "잘됐네. 저도 결혼했어요!" 반색하며 내 손을 덥석 잡던 유부남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이랬다.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때가 돼서 결혼했다고. 마누라가 살뜰하기는 한데 여우 같은 맛이 없어 재미는 없다고. 부담 없이 연애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내가 유부녀라 오히려 좋다고. 마음에 든다고. 전화번호 좀 달라고.

남자가 결혼했다고 해서 갑자기 고자가 되어버리는 것도 아니니, 저도 모르게 이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것을 어찌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남자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 보는 여자라고 하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이 그 얼마나 아리따워 보이겠는가. 나는 본능에 충실한 그를 질책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동반자에 대한 의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가 사나이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결혼식장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내를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남편으로서 도리를 다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을 맹세합니까?" 하는 주례의 물음에 우렁차게 "네!" 하고 대답했을 거면서.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였거늘, 한 입으로 두말하고 있으니 영 지질해 보이고 별로다.

나는 오지도 않은 전화를 받으며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어, 아들. 엄마 이제 들어갈 거야. 그래, 금방 간다니까. 울기는 왜 울어? 뚝 그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를 붙잡는 대신, 곧바로 다른 여자에게 낯짝을 들이댄다. "저기여어! 혼자 오셔쒀여? 너어어어어무 아름다우셔서…." 의리는 없어도 끈기는 있네. 성공을 기원한다 이 자식아! 징글징글한 남자로 가득 찬 술집을 나서며 생각한다. 나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남자를 만나고 싶다. 금은보화를 주지 않아도 좋으니 변치 않을 믿음 하나만 내게 준다면 평생을 약속하겠다. 복사꽃 만발한 어느 봄날에 주먹 불끈 쥔 팔을 서로 엇걸고서 "의리!"를 외치며 도원결의할 남자, 어디 없을까?


이주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