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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바람아님 2017. 5. 18. 08:49
조선일보 2017.05.17. 03:10
김광일 논설위원

어느새 늙은 봄이 떠나려 채비를 갖추고 있다. 너무 바쁜 척하다 5월 장미에 눈길 한번 못 줬다. OECD 회원국에서 대통령 둘이 탄생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다. 결선투표 일주일 뒤 마크롱 취임식을 동영상으로 봤다. 표정은 상기돼 있고 목소리가 앳됐다. 묵직하고 노회했던 전임자들처럼 쇳가루를 갈아내는 듯한 경륜은 없지만 젊은 대통령답게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프랑스 대통령 취임사는 항상 '전임자 평가'가 백미다. 마크롱은 드골이 "프랑스의 위상을 되살렸다"고 했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프랑스를 현대화하고", 미테랑은 "프랑스와 유럽의 꿈을 조화시킨" 업적을 기렸다. 시라크에겐 "전쟁을 획책하는 자들에게 '노'라고 말했다"고 했다.


지난주 서울에서 홍준표·안철수, 두 후보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당선인을 축하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아랑곳없이 투표 날 밤 11시 반쯤 문재인 후보가 광화문 당선 축하 무대에 올라 "정의로운 나라"를 외쳤다. 이튿날 당선증을 받은 그는 또다시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다. 후보 수락 때부터 거듭된 '정의'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밟혔다. '정의'가 권력자의 것이 될 때 '정의롭지 못한' 상대를 솎아낼 명분으로 변질됐던 역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적폐 청산'은 너무 선명하게 공약집에 박혀 있다. 팬들이 열광한다면 물릴 수도 없다. 그는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다"고 했다. 실제로 내년 봄 '정의로운' 지지자를 광장에 모을지 모른다.


16년 전 동인문학상을 받은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 서문에 썼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 당시 작가는 자신이 겪은 어떤 사회 갈등을 말했을 뿐 지금 정치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나는 그걸 다시 읽어 나의 표현으로 전한다. '이 봄에 정의로운 사람들과 작별하고 싶다.'


사실 문 대통령 취임사에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전임 대통령들에 대해 한 줄 평가를 내놓았으면 했다. 그러나 그는 '탄핵된 대통령'과 '불행한 대통령들의 역사'라고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그것을 딛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겠다"고 두 번 말했다. 호명도 없었고,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와 재도약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프랑스는 우파 정권 10년 끝에 2012년 사회당이 대선을 이겼다. 그때 상황이 지금 우리 민주당과 비슷했다. 올랑드 대통령이 취임사를 했다. "공화국을 이끌어온 대통령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면서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드골에겐 '프랑스의 위대함', 미테랑에겐 '진보에 공헌'이란 표현을 헌정했고, 직전 대통령 사르코지에겐 "이제 새 삶을 열어갈 그를 축복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을 '탄핵'과 '불행'으로 요약했을 뿐, 다른 평가는 없었다. 탄핵당한 쪽은 상대를 탄핵 프레임에 가두기도 한다. 정의는 때로 독선(獨善)과 이웃사촌이다. 나도 이제 절박한 오류만 남기고 잔인했던 봄을 보낸다. 단가 '사철가'를 부르는 명창 목이 봄 대목부터 청승맞게 꺾인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