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시선 2035] 내가 바라는 성스러운 사회

바람아님 2017. 6. 15. 10:10
중앙일보 2017.06.14. 02:41
홍상지사회2부 기자
한 달 전 페이스북에서 흥미로운 영상을 봤다. 영상 속 주인공은 40대 엄마와 20대 아들. “엄마도 자위를 해?”라고 묻는 아들에게 엄마는 “응, 열아홉 살 때부터였나? 해 보니 좋더라”고 답했다. 엄마와 아들은 성(性)에 대한 각자의 시각과 경험담을 거침없이 말했다. 댓글에는 ‘지금 혹시 5017년인가요?’라고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전문강사 손경이(47)씨 모자(母子)다. 손씨는 “‘성’이라는 게 음지의 영역이 아닌, 누구든 툭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주제라는 걸 영상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2일에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성 토크콘서트’까지 했단다. 60명 정도 되는 관객의 대부분은 20~30대 여성이었다. “남자친구와 여행을 가거나 외박을 할 때는 엄마한테 늘 ‘친구랑 있다’고 거짓말을 해요”라는 고백부터 “‘자기 위로’는 그동안 남자들만 하는 건 줄 알았어요”라는 깨달음(?)까지 대화 소재는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정조’를 강요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성’은 한국 사회에서 다소 터부시하는 주제 아니었나. 더욱이 여성에게는 말이다. 나 역시 이런 얘기는 주위 사람들에게 편히 하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부모님 앞에선 더하다. 어린 시절 ‘콘돔’이라는 단어를 보고 “콘돔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민망해하던 부모님의 반응을 본 이후였던 것 같다. 훗날 콘돔의 진짜 용도를 알게 된 나도 뒤늦게 얼굴이 붉어졌다. 만약 당시 둘 중 누군가가 “콘돔은 연인이나 부부가 더 안전하게 사랑을 나누려고 쓰는 거야”라고 말해 줬다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성이 가로막힌 우리 사회는 어딘지 음흉하고 폭력적이다. “왜 모든 여자 연예인이 산부인과를 숨어 다녀야 합니까?” 얼마 전 가수 가인은 자신의 ‘임신 루머’를 반박하며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후 온라인에는 “‘결혼도 안 한 여자가 웬 산부인과?’라고 생각할까 봐 산부인과에 갈 일이 있으면 상사에겐 내과 갔다 온다고 한다” “편의점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집어들면 종업원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연인과 모텔에 들어갈 때 괜히 지나가는 사람 눈치를 살핀다” 등 성(城) 안에 갇힌 성에 대한 일화들이 터져 나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곧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좀 더 ‘성’스러운 사회에 살고 싶다. 문란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해방되고 싶다는 뜻이다. 당장 사소하게나마 실천할 방법은 없을까. 손씨는 토크콘서트에서 관객들과 짠 ‘작전’을 귀띔해 줬다. 첫째, 가방에 콘돔을 넣어 두고 일부러 툭 떨어뜨린다. 둘째, 부모님이나 누군가가 이를 보면 당당히 말한다. “그거? 내가 요즘 쓰는 거야.”


홍상지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