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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지영]당신, 울고 싶나요?

바람아님 2017. 6. 9. 08:59
동아일보 2017.06.08. 03:03



서울 종로구 율곡로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자화상 사진관’에는 평일 3, 4명, 주말에는 6, 7명이 다녀간다. 1시간에 한 명 입장시키는 이 사진관의 하루 평균 수용 인원이 8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만만찮은 호응이다.

이 사진관에선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사진 찍을 수 있다. ‘셀프 카메라’를 떠올리게 되지만, 사진관에서의 촬영은 21세기의 유행인 ‘셀카’와는 다르다. 관람객은 혼자 방에 들어가 앞에 놓인 커다란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 주어진 시간은 30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손에 들린 셔터를 누르면 된다. 디지털 사진이 아니라 수동 카메라여서 보정은 없다.


사진을 찍은 뒤 소감을 적는 후기 중 자주 보이는 것은 ‘힘들다’는 글귀였다. 아이디어를 낸 사진작가 김현식 씨는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정면으로, 오랜 시간 보는 걸 못 견뎌 하더라”라고 전했다. 5분도 안돼 셔터를 누르고 도망치듯 나오는 사람, 거울 앞에 서서 오래도록 눈물을 흘리는 사람…. 30대 중반의 한 청년은 끝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웅크린 채 사진을 찍었다. 그는 후기에 ‘슬프다’고 적었다. 김 씨는 가수 딘딘 얘기도 들려줬다. TV 화면에선 장난기 많고 활발한, 누구보다 카메라가 자연스러울 것 같은 그가 자화상 사진관에 들어갔다 나와선, 사진관 주변을 빙빙 돌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또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의 ‘호상근재현소’다. 여기서는 화가 호상근 씨가 비밀번호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그림을 그려준다. 참여하고 싶은 관람객은 나무로 만든 부스 안에 들어가 칸막이 너머의 화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매주 토요일 오후 열리는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호 씨는 “세상을 떠난 개나 고양이 이야기, 헤어진 연인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반려동물, 사귀는 이성친구와 관련된 숫자나 이니셜로 비밀번호를 만드는 경우가 적잖아서다.


아무 때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지인들에게 분노든 하소연이든 던질 수 있는 때에, 직접 미술관을 찾아와서 낯선 사람에게 가슴 아픈 과거사를 털어놓는 이유가 뭘까. 옛 남자친구와 처음 만난 날을 지금껏 비밀번호로 쓴다는 한 30대 여성은 ‘호상근재현소’에서 연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털어놓은 뒤 “제3자가 돼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아는 사람에게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기 쉬워 오히려 꺼려진다”며 “이곳에서의 체험은 내가 객관화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이런 사연들을 듣고 작가가 그린 그림은 풍경, 사물 등 다양하지만 모두 고백을 담은 초상화인 셈이다.


인물을 그리는 초상화를 가리키는 영어 ‘portrait’는 ‘portray’의 어원인 라틴어 ‘protrahere’에서 유래한다. ‘protrahere’는 ‘끄집어내다’ ‘발견하다’라는 뜻이다. 한 사람을 그린다는 건 인물의 한순간을 영원히 남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의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도 투영돼 있다. 스스로를 그리는 자화상 역시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담겼다.


자화상 사진관의 김현식 씨는 “SNS의 시대라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SNS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타인과의 네트워크로 무장된 오늘날, 다른 사람 없이 오롯이 자신을 들여다보기란 분명 수월치 않다. 그렇지만 두 곳 미술관에선 이런 힘겨움을 기꺼이 겪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남에게 보여주고 남이 달아주는 댓글 없이, 홀로 스스로를 끄집어내고 스스로와 교감하는 시간. 이것이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갖고자 하는 시간이자 SNS의 끊임없는 알림에 지친 이 시대에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김지영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