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쓰고 위협하면 피하고 보는가.. 굴복할수록 협박의 악순환 초래
일부 시민단체들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을 때는 나름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막무가내여도 "독재자 기념우표가 웬 말이냐"는 주장만으로 이미 발행하기로 정한 것을 뒤집긴 어렵다. 찾아보니 우정사업본부 '우표류 발행세칙'에 '정치적 종교적 학술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는 기념우표를 발행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어이없는 조항이다. 논란이 제기되면 주장이 타당한지 따져보는 게 순리인데 이 조항대로라면 논란거리로 만드는 데만 성공하면 우표 발행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반대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며 아무 반발이나 다 정당화해줬다가 온 나라가 결딴났던 문혁(文革) 시기 중국의 조반유리(造反有理)와 뭐가 다른가.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를 반대한 이들과 그들의 압박에 굴복한 우정사업본부 측은 호찌민 기념우표 사례를 공부하길 바란다. 1950년대 북베트남은 호찌민 주도로 토지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지주를 학살하고 군대를 동원해 농민 봉기를 진압하느라 1만~1만5000명의 국민을 살해했다. 우리라면 그런 사람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할 수 있을까. 하지만 베트남은 1890년생인 그의 탄생 90주년, 100주년, 110주년, 120주년에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그가 저지른 대규모 살상의 과(過)보다는 오늘의 베트남이 있게 한 공(功)을 더 소중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빗거리는 피하고 보자는 회피의 태도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현상 중 하나다. 말이 안 되는 주장에 눌려 사회의 기본 질서가 맥없이 해체되고, 국가의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지난해 정한 것을 올해 뒤집어버린 박정희 기념우표 철회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지난주 국방부가 경북 성주에서 사드 레이더 전자파의 안전성을 측정하려다 거부당했다. "먼저 사드부터 철회하고 측정하자"는 억지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대한민국 국방부가 두 손을 들어버렸다. 앞서 성주 사드 기지 앞에서 공권력이 검문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빚어진 것도 우리 정부가 "떼쓰고 협박하면 다 되더라"는 경험을 사드 반대 단체 측에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천안시는 반미(反美) 단체들이 반발하자 계획했던 주한 미군 관련 축제를 철회했고, 의정부에선 인기 가수들이 일부 시민단체들 위협에 굴복해 미 2사단 창설 100주년기념 콘서트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협박과 시비 걸기가 잘 통하니 무슨 일만 있으면 싸우자고 달려드는 것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존경받는 링컨은 노예해방 문제로 두 쪽 난 나라를 통합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위대한 업적의 바탕엔 부당한 협박에 당당히 맞서 싸운 용기가 깔려 있었다. 대선 승리 후 일리노이주(州)를 떠나 수도 워싱턴으로 가려던 링컨은 "워싱턴에서 취임식을 거행하면 암살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받았다. 링컨의 대응은 단호했다. "교수형을 받는 한이 있어도 안전한 취임식을 위해 전전긍긍하며 피하지는 않겠다." 당시 워싱턴을 지키던 육군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은 남부 편인지 북부 편인지가 불분명했다. 그러나 링컨의 용기에 감복해 "새 대통령에게 전해달라. 일단 이곳에 도착하면 그분의 안전은 내가 책임진다"며 북군 편에 섰다.
오는 광복절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공연하는 미국 가수 아리아나 그란데는 지난 5월 영국 맨체스터 공연 때 테러가 터지자 "공연을 취소하면 테러를 저지른 이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며 재공연을 강행했다. 부당한 압력에 저항하지 않는 우리 사회가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용기 있는 선택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안보 위기도 북핵과 미사일에 "안 된다"는 분명한 원칙을 지키지 않고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북측과 타협한 탓이 크다. 협박하면 남측의 자칭 평화 애호가들이 다 들어주자며 나서는데 그들이 뭣하러 우리를 존중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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