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길을 돌렸다. 귀항 길에 들른 다카시마(孤島)섬엔 미쓰비시 탄광 역사관이 있었다. 갱부 작업복과 굴착기, 개미굴 같은 해저 갱도와 장비들이 제국 일본의 자부심인 양 번쩍였고, 지상엔 미쓰비시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의 동상이 섰다. 조선인 흔적은 지워졌다. 당시 나가사키 공장 지역에 끌려온 조선인 수는 약 2만 명, 다카시마와 하시마 탄광에만 약 4000명을 헤아렸다. 하시마에서 항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의 노예노동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이 끝장냈을 뿐이다. 영화 군함도처럼 일본군을 죽이고 석탄수송선에 올라탄 징용자들의 귀향 투쟁은 상상의 한풀이다. 해방 72주년, 우리는 아직 상상의 복수전을 끝내지 못했다. 잔혹한 식민의 기억은 이렇게도 아프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 일본도(刀)에 죽은 30만 명의 영혼을 기리는 곳이다. 중국 청년들은 한결같이 외쳤다. ‘인간은 용서하지만, 역사는 잊을 수 없다’고. 시진핑 주석이 한 말이었다. 과연 인간을 용서했을까? 아니다. 요즘 시진핑 주석의 언행을 보면, 20세기 중국의 치욕에 대한 한(恨)이 읽힌다. 역사의 상처와 학살 기억을 한꺼번에 치유하려는 패권적 발상에 오기가 서렸다. 일본엔 그렇다 치더라도, 피해자 한국을 저리 사납게 내치는 것은 중화문명의 도(道)가 아니다. 시진핑의 군사력 대행진에 현대차·아모레화장품·롯데마트가 짓밟히고, 한류가 쫓겨났다. 한·중 관계는 1992년 수교 이전의 냉랭한 상태로 돌아갔다.
예정된 코스가 앞당겨졌을 뿐이라는 진단에 수긍이 가지만, 외교는 작고 사소한 불씨가 결정적이다. 박근혜가 단독 감행한 사드 배치가 화근이었다. 사전 양해가 있었다면 문풍지 바늘구멍에 스미는 한 가닥 햇살 같은 출구가 가능했을지 모른다. 사후라도 특사를 보내 달랬어야 했다. 대인기피증이 심한 박근혜의 외톨이 외교에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되돌릴 수는 없지만, ‘느닷없는 회군’의 사정을 한국인조차 납득하지 못한다는 사정을 중국과 일본에 알려줘야 한다. 그 불량 통치 당사자는 탄핵 심판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고. 일본 지식인들은 65년 한일협정과 66년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피해보상이 일괄 타결되었다고 믿는다. 일반 시민들은 국가 간 약속을 자꾸 번복하는 한국에 피로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피곤한 한국인이라는 정서가 강하다. 중국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미국의 강수를 한국이 어떻게 거부할까, 사드 갈등을 ‘미·중(美·中) 문제’로 규정하는 소수 지식인의 목소리는 ‘줏대 없는 얄팍한 민족’이란 대중 욕설에 묻혔다. 북한은 기세등등, 반미 미사일놀이로 날이 샌다.
영화 군함도의 상상적 한풀이가 8·15 광복의 인류사적 의미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광복(光復), ‘다시 빛 속으로’는 가해자의 치졸한 변명을 문명적 대의로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원폭 피해의식을 앞세워 가해의 역사를 지워버린 일본에는 피해보상보다 한 수 위의 대일외교를 구상해야 했다. 패권주의로 치닫는 중국몽은 일본보다 더 잔혹한 가해자를 예고한다는 것을 피해자 한국이 알려줘야 한다. 일본과 중국에 끼어 쩔쩔매는 한국, 트럼프의 전쟁불사론, 역대급 외교 낭패다. 불량 외교의 전말과 책임소재를 밝혀야 바늘구멍을 찾는다. 올해 광복절의 최대 현안이다. 그럴 걸 예견했는가. 군함도의 마지막 장면, 탈출하는 석탄수송선에서 원폭 버섯구름을 바라보는 어린 소희의 표정은 난감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其他 > 송호근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호근 칼럼] 하필 이때에 공신 외교라니 (0) | 2017.09.06 |
---|---|
[송호근 칼럼] 늦여름 텃밭에서 (0) | 2017.08.23 |
[송호근 칼럼] '잃어버린 10년' 만회하기 (0) | 2017.07.26 |
[송호근 칼럼] '뻥'축구의 유혹 (0) | 2017.07.12 |
[송호근 칼럼] 제국의 오디션 (0) | 2017.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