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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국 경제의 생체실험 … 소득주도 성장

바람아님 2017. 8. 24. 10:17
[중앙일보] 입력 2017.08.23 02:27
이철호 논설주간

이철호 논설주간


문재인 정부의 경제 분야 실세는 누구일까? 김동연 경제부총리? 장하성 정책실장? 집권 세력 내부에선 “진짜 숨은 설계사는 홍장표 경제수석”이라 입을 모은다. 장하성 실장도 오후에 시간이 나면 홍 수석과 청와대를 산책하며 소득주도 성장론에 귀를 기울인다고 한다.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존중받는 세상” “일자리 만드는 데 쓰이는 세금이 가장 값지다”…. 이런 문 대통령의 발언들도 모두 소득주도 성장에서 비롯된다.
 
새 정부가 밀어붙인 비정규직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공무원 일자리 늘리기, 통신료 인하, 건강보험 보장 확대, 기초연금 인상 등도 알고 보면 2년 전 당시 홍장표 부경대 교수가 제시한 내용이다. ‘포용적 성장과 소득주도 성장론, 위기의 한국경제 해법인가’라는 포럼에서 열거한 정책 과제들이다. 당시 발제문을 다시 살펴보면 소득주도 성장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22%→25%), 소득세 인상, 생활임금제, 상생 임금교섭, 대기업-중소기업의 성과·이익 공유제,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지수 등이 줄줄이 도입될 게 분명하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이른바 ‘임금주도 성장론’의 한국판이다. 자영업 비중이 높은 우리 현실에다 ‘임금’보다 ‘소득’이란 표현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경제학계에선 이들을 ‘포스트 케인지안’으로 분류한다. 얼핏 보면 재정 확대로 부족한 유효수요를 메우는 케인스주의의 아류처럼 보인다. 하지만 네이버 지식백과에서조차 이들을 ‘이단(異端)의 경제학’이라 규정한다. 왜 그럴까.
 
신고전학파나 케인스주의는 기본적으로 시장을 믿는다. 새로 등장한 ‘포용적 성장’도 신자유주의의 시장 실패를 보완하는 수준에 머문다. 하지만 포스트 케인지안은 시장이나 ‘보이지 않는 손’ 자체를 믿지 않는다. 시장은 반드시 실패하며 정부가 지속적, 제도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포스트 케인지안의 투자함수도 독특하다. 이자율의 함수가 아니라 소득(임금)의 함수라는 것이다. 이들은 소득(임금)이 오르면 소비가 늘고, 소비가 늘면 투자도 늘어나 경제가 성장한다고 ‘믿는다’. 소득은 성장의 결과이지 경제성장의 원천이 아니라는 주류 경제학과 정반대다.
 

지금 소득주도 성장론의 골간은 운동권 경제학이다. 서울대에서 김수행 교수의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변형윤 교수의 경제발전론을 배운 제자들이 많다. 대부분 유학을 가지 않은 순수 국내파다. 문제는 이들의 가설이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이론이란 점이다. 임금은 가계에는 소득이지만 기업에는 비용이다. 임금 인상으로 생산비용이 올라가면 오히려 투자가 줄고 일자리가 감소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이론이 ‘폐쇄경제 체제’를 전제로 하는 것도 문제다. 개방경제에선 임금 인상으로 생산비용이 상승하면 상품 가격이 올라 수입품에 밀리거나,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어느 선진국도 소득주도 성장을 경제모델로 삼지 않는다.

 
물론 1987~89년 한국이나 2005~15년 중국에서 임금 상승이 소비 확대와 경제성장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이례적인 시기였다. 그 이전 오랫동안 임금이 생산성 증가율에 훨씬 못 미치게 억제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생산성 증가율과 임금 상승률이 엇비슷하게 동행하는 시대다. 또 한국은 개방경제에다 임금 지급 능력이 미흡한 중소기업 종사자가 압도적이다. 그만큼 소득주도 성장은 성공 가능성이 낮고 부작용이 큰 비현실적 이론이다.
 
이 모델은 한번 실험하고 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재정이 망가지고 나서야 청구서가 날아든다. 한번 오른 임금도 떨어지기 쉽지 않다. 하방경직성 때문이다. 기업들이 고비용 구조로 인해 투자를 외면하고 해외로 탈출하면 국제경쟁력을 되찾기도 어렵다. 지금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미국·일본을 중심으로 세계 경기가 회복 중이며 4차 산업혁명도 진행되는 골든타임이다. 규제완화와 노동개혁으로 경제성장을 도모하기 딱 좋은 시기다. 결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혁신과 생산성 향상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때에 소득주도 성장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아마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정치적 이유와 맞물려 이 실험은 누구도 걷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버드·스탠퍼드·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소득주도 성장론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든다. 지금 세계 11위 경제대국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의 침묵 속에 이상한 생체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철호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