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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108] "방울 갖다 놓아라"

바람아님 2017. 9. 12. 08:46
조선일보 2017.09.11. 03:14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이야기를 채취하는 직업인 채담가(採談家)의 입장에서 보면 3가지 종류의 주제에 관심이 집중된다. 1등급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스토리이다. 희생, 양보, 관용과 관련된 내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다음에는 정신세계에 대한 내용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또 다른 정신세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단서를 제공하는 이야기들이다. 3등급은 피눈물 흘린 고생담이다. 국립암센터 초대·2대 원장을 지낸 박재갑(70) 교수의 조상꿈 이야기는 정신세계에 대한 내용이다.


박재갑의 15대조인 정절공(貞節公) 박광우(朴光佑·1495~1545)는 을사사화 때 죽었다. 직언을 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박광우의 묘는 400년 넘게 파주 법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1967년에 이 묘를 14대조 이하 조상 묘가 있는 청주시 남이면 선산으로 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재갑의 사촌 형 꿈에 수염 난 장신의 노인이 나타나 '내가 놓고 온 방울을 갖다 놓으라'고 당부하는 게 아닌가. 집안사람들은 '방울이라니! 무슨 이야기인가?'하고 의아했다.


이장을 하면서 관뚜껑을 열었을 때 시신은 미라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키가 크고 수염이 긴 모습이었다. 16세기 중반에 상류층 묘를 쓸 때는 관 위에 석회를 부어 나무뿌리나 짐승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다 보니 밀봉돼 미라로 보존된 것이다. 석회로 밀봉된 묘를 팔 때 5개의 청동 방울이 나왔는데, 현장에서 이장 작업을 하던 인부가 이 방울을 자기 집 장롱에 보관하고 있었다. 청주의 박재갑 집안사람들이 파주에 찾아가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방울 혹시 없었느냐'고 물으니까, 그 방울을 보관하고 있던 사람은 기겁했다.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조선 선비들은 평상시에 방울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 방울 소리를 들으며 항상 깨어 있기 위해서였다. 서울대 의대 교수를 지낸 박재갑 박사가 대학 1학년 때 직접 목격한 집안일이다. 400년 전에 죽은 양반이 어떻게 시공을 초월해 후손의 꿈에 나타나 "방울 갖다 놓으라"고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이런 사례를 보면 영혼의 세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조선일보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