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2017.09.29. 18:50
잎 떨어진 두그루 나무·안개 핀 숲은 쓸쓸함 더해
특정 장소가 아닌 마음 속에 풍경 그린 '관념산수'
명암법으로 날릴듯한 털 구사한 '흑구도'도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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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고 비워 버렸을 때 비로소 떠오르고 가득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림 속 둥근 보름달이 그렇다. 화가는 달을 그리기 위해 ‘달을 그리지 않는 것’을 택했다. 대신 달무리처럼 언저리에 둥그렇게 어둑한 테를 둘렀다. 그랬더니 주변 배경을 뒤로 밀어내고 동그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드리지도 칠하지도 않았건만 빛을 발하고 그 아래를 비춘다. 흰 달에 색을 더할 수 없어 달 만 남겨둔 채 나머지 부분을 채색하는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이라는 전통 화법이 쓰였다. 드러내기 위해 감추는 그림 기법은 음악 중간의 적막, 시(詩)의 함축과도 같다. 노자가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 도의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로 이를 얘기했고, 뒤이어 ‘있음(有)과 없음(無)은 같은 데서 나왔으나 이름만 달리할 뿐이니 지극한 오묘함이 이를 통해 나온다’(此兩者同出 而異名···玄之又玄 衆妙之門)며 재차 강조했다. 없음에서 존재하고 있음에서 비워진 존재가 바로 그림 속 달이요, 여백의 미도 마찬가지다. 굳이 말하지 않고도 심중을 드러내고자 한 화가의 마음이 그대로 그림이 됐다.
달이 분위기를 만들었으니 그 달빛을 받아 주연배우처럼 앞장선 것은 그림 왼쪽의 잎 떨어진 나무 두 그루다. 나무 하나는 수직으로 꼿꼿이 섰고, 나머지 하나는 쓰러질 듯 비스듬히 옆으로 누운 형상이다. 건너편 안개 드리운 숲이 가을의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더한다. 곧은 나무가 가슴 활짝 펴고 달빛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형상이라면 허리 숙인 노목은 자연에 순응하는 숙연함을 전한다. 온 가족이 모이는 한가위건만 어째 그림을 보는 시선은 홀로 앉은 선비의 눈이다. 그에게 나무의 모양은 중요치 않다. 말라죽은 고목이어도 가지 끝은 여전히 카랑카랑 생생하다는 게 의미있는 모양이다. 짙은 색으로 표현된 가지 끄트머리가 인상적이다. 마른 나뭇가지의 구부러진 모습을 게의 발처럼 날카롭게 그리는 해조묘(蟹爪描) 기법이 쓰였다. 나무 아래로 굽이치는 급류와 바위, 언덕의 풀까지 화가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려냈다. 그 탄탄한 자신감이 그림을 떠받치고 있으니 혼자일지라도 결코 외롭지 않다.
이 한 폭의 풍경화는 특정한 장소를 그렸다기 보다는 우리네 마음 속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라 하겠다. 화가 또한 어디서 무엇을 보고 그렸는지는 생략하고 날짜만 적었다. 300년 된 그림이 전하는 감동도 그 마음의 울림 때문일 게다. 무엇이 그토록 그리웠으며, 소리 내지 못한 채 목구멍으로 삼켜버린 말은 무슨 얘기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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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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