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김동호의 시시각각]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바람아님 2017. 10. 10. 13:50
중앙일보 2017.10.09. 01:21

뜨거운 가슴만으로 안 되는 J노믹스

낡은 규제 풀어 혁신 병행해야 성공

김동호 논설위원
“경제학 족보에도 없다”는 공격을 받은 소득주도 성장은 과연 경제학 어디에도 근거가 없을까. 어딘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책장에서 경제학 원론을 꺼내들었다. 그레고리 맨큐는 신자유주의에 기울었다는 지적이 많으니 폴 새뮤얼슨 버전(15판)을 들여다봤다. 새뮤얼슨은 시장의 힘을 중시하는 애덤 스미스(스미디언)는 물론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케인지언)까지 주요 학파의 장단점을 두루 평가한 덕에 ‘경제학자들의 경제학자’로 불린다.

시장효율·형평·소득분배를 다룬 제4부 15~20장의 내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무리 뒤적여도 생산성 향상 없이 소득이 성장을 이끈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래도 굳이 소득주도 성장의 근거라고 한다면 “시장의 비효율성 때문에 소득이 공정하게 분배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정부가 빈곤 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써 놓은 대목일 듯싶다. 그런데 그 해법을 제시한 스미디언과 케인지언의 백가쟁명에 대해 새뮤얼슨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


이에 비추어 보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J노믹스)을 둘러싼 논쟁도 다를 게 없다. 소득주도냐 혁신주도냐면서 갑론을박 중인데, 분명한 것은 교조주의는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새의 양 날개처럼 경제도 성장과 분배의 조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청와대의 J노믹스 운전자들은 일자리 및 소득주도, 공정경제, 혁신성장 가운데 혁신성장만 쏙 빼놓고 한국 경제를 운전해 왔다. 최저임금 인상, 정규직화, 법인세 인상, 통상임금 압박, 양대 노동지침 폐기 등으로 기업을 옥죄는 ‘친노동·반기업’ 조치들을 쏟아냈다.


그로부터 5개월이 흐른 지금 J노믹스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8월 청년실업률은 18년 만에 최고였고, 제조업 평균가동률·소비·투자·건설 지표가 줄줄이 곤두박질쳤다. 9월 수출 사상 최대라는 낭보가 있었지만 반도체 단독 플레이였다. 이쯤 되면 J노믹스를 운전하고 있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홍장표 경제수석, 김수현 사회수석, 김현철 경제비서관은 J노믹스를 과감하게 정비해야 한다. 이들의 핵심 가설은 ‘스미디언의 계보에 뿌리를 두고 규제 완화와 감세를 내세운 신자유주의로는 소득 격차와 저성장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규제를 풀고 감세해도 대기업의 독점 이익만 불려주고, 국민의 소득과 삶은 달라질 게 없다는 논리다.


이런 진단은 타당하다. 그래서 해소 노력도 필요하다.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등 세계적 경제 석학들도 앞장서 주장해 온 내용이다. “분배의 실패로 불평등이 커지고 있으니 정부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하지만 급격하거나 치우쳐선 곤란하다. 기술 발전에 따른 구조적 문제와 보호무역주의에도 대처하려면 혁신을 통한 성장동력 유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인공지능을 비롯한 4차 산업혁명에 순응하고 있는 지금, 한국은 중국에도 일부 분야에서 뒤처져 있다. 30년 전 굴뚝산업 시대의 규제로 기업의 혁신과 도전을 가로막고 있어서다.


뒤늦게 문 대통령이 “혁신성장의 집행전략을 속도감 있게 마련해 달라”고 지시한 것은 다행이다. 관건은 J노믹스 운전자들이 규제의 감옥에 갇힌 기업들에 혁신성장의 길을 얼마나 열어줄 것인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따뜻한 경제정책이라도 성장동력을 꺼뜨리면 도루묵이 된다. 그래서 앨프리드 마셜 이후 경제학 구루들이 “경제 문제를 볼 때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지라”고 주문하지 않았을까. 청와대의 J노믹스 운전자들이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