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朝鮮칼럼 The Column] 복지, 외국 껍데기만 따라가는가

바람아님 2017. 10. 30. 10:09

(조선일보 2017.10.30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선진국 제도 파악하는 '知彼', 우리와 맞는지 따지는 '知己'
정책의 맥락 아는 게 중요한데 선진 복지라면 무조건 도입해
아동수당 월 10만원 준다지만 저출산엔 일·가정 양립 더 중요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추격형 경제를 졸업하고 선도형 경제로 진입해야 한다는 다짐이 지난 십여 년간 경제정책의 화두였지만,

복지 정책 입장에선 그 다짐이 부럽기만 하다. 제발 추격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싶기 때문이다.


후발자의 이득을 제대로 챙기기 위한 기본 요건은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다.

선진국의 특정 제도가 좋아 보인다면 실태를 정확히 파악한 후 그렇게 된 사연을 생각해보는 것이

'지피'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필요에 의해 그리되었는지 맥락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기'는 우리의 맥락에 맞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선진국 복지제도들이 대부분 2차대전 이후에 크게 확장됐는데, 이는 4년간의

세계대전 동안 사회적 연대와 국가에 대한 신뢰가 크게 강화됐을 뿐 아니라 전후 30년이 '자본주의 황금기'라 불릴 만큼

역대 최대의 호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그들의 호시절을 그대로 재현해내지 못하는 이상 맥락의 차이를 고려하는

것은 복지 정책 설계의 핵심이다.


이 정도 지피지기가 뭐 어렵겠나 싶지만, 우리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불과 몇 년 전 보육 지원 확대 과정을 떠올려보자.

2009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무상 급식 문제가 불거진 후 스웨덴 같은 보편 복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논쟁으로 확대되더니,

급기야 2012년 대선을 거치면서는 엄마의 취업이나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누구나 어린이집에 자녀를 주 68시간까지 맡겨도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막상 보편 복지와 관대한 양육 지원의 상징인 스웨덴도 전업주부 엄마에게는 주 15시간 정도의 어린이집 이용을

지원할 뿐이다. 더구나 소득 수준에 따라 양육 지원에 차등을 둔다. 가구마다 사정이 다르니 모두가 필요한 서비스에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려면 사정을 감안해 지원에 차등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DB


보편 복지를 추구한다며,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지원을 대폭 확대하는 바람에 어린이집 이용이 갑자기 공짜가 됐고

전업주부들은 대거 어린이집에 자녀를 맡기기 시작했다. 예산은 급증했지만, 정작 어린이집 이용이 절실한 취업모들이

어린이집 자리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됐다.

결과적으로 당시 결정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진 정책 실패 사례이다.

초보적인 '지피'를 못해 후발자의 이득을 홀랑 낭비한 것이다.


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내년 예산안에는 1조 1000억원이라는 액수가 '저출산 극복을 위한 아동수당'이라는 명목으로

잡혀 있다. 5세 이하 아동을 가진 전체 가구에 월 10만원을 지급하는 것이다. 월 10만원 때문에 자녀를 가질 것이라

믿고 예산을 짜다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아동수당을 주장하는 복지학자들의 근거는 어지간한 선진국이 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후의 복지 확장이란 시대적 경제적 맥락뿐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저출산에 관해 새로이 쌓인 지식까지 간과한

주장이다. 근래의 많은 연구들은 젊은 세대가 자아실현과 일·가정 양립에 대해 가진 기대치가 사회규범 및 제도와 괴리된

것이 저출산의 근본적인 병목이며 이 때문에 금전적 지원으로 출산율을 올리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우리의 복지정책은 여전히 '지피'를 익히지 못했다.


자녀를 가진 가구와 그렇지 않은 가구 간의 소득 재분배가 아동수당 도입의 주된 의도였다고 말을 바꾼다고 해도

이런 안타까움이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유럽식 복지제도와 함께 복지제도를 세제에 내장하는 미국식 복지모델(hidden welfare state)도 차용해왔다.

그 결과 자녀세액공제, 자녀장려금(CTC) 등 세제를 통해 유자녀 가구의 소득을 지원하는 제도를 이미 가지고 있다.

만약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기존의 다른 제도들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의 재분배가 더 필요한지, 유사 목적의

다양한 제도를 어떻게 조율하고 통합할 것인지 등을 언급했을 것이다.

'지피'에 더해 '지기' 역시 문제인 것이다.

선도자란 자타의 경험과 그로부터의 교훈을 숙지하고 성찰한 후 모방이 아닌 새로우면서도 진일보한 경로를

설계해낼 수 있는 지적 능력자다.

우리는 스스로 선도자에 가까워졌다고 믿고 싶어하지만, 적어도 복지 정책에서는 아직 추격자로서도 하수다.

예측하건대 다음 대선 즈음해서는 아동수당을 배로 올리고 대상 연령을 두 배로 넓히는 공약을 놓고 정당 간의 경쟁이

치열할 것이다. 이제껏 봐왔듯 설명 없이 슬며시 시작하고 선거 때마다 늘리는 방식이다. 그때쯤은 정책 목표나 제도 간

조율에 대한 합리적 계획이 마련될 것이라 기대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