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産業·生産·資原

[한삼희의 환경칼럼] 비관적 생태학자와 낙관적 경제학자의 내기

바람아님 2017. 12. 10. 08:10

(조선일보 2017.12.09 한삼희 수석논설위원)

'자원 고갈' 놓고 벌인 1000달러 내기에서 경제학자의 樂觀이 승리
신고리 공론화에서 중단, 재개 극단 말고
짓되 안전성 높이는 타협은 불가능했나


한삼희 수석논설위원한삼희 수석논설위원


원자력 찬반(贊反)은 세계관의 대립이랄 수 있다.

과학기술의 가능성과 인류의 에너지 미래를 놓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부딪친다.

대개 생태학자는 비관적이고 경제학자는 낙관적이다.

극명한 예가 미국 생태학자 폴 에를리히와 경제학자 줄리언 사이먼 간 내기였다.

에를리히는 인구 증가가 식량·자원의 고갈을 야기해 지구 재앙을 몰고 올 거라는 입장이었다.

'인구 폭탄(The Population Bomb)' 책에선 강제적 인구 억제도 주장했다.

반면 사이먼은 인간의 혁신과 시장경제 시스템이 인구·자원 압박을 극복시켜 줄 거라고 했다.

자원이 고갈되더라도 수요만 있으면 인간 창의력이 대체품을 찾아낸다.


둘 다 선동적이고, 독설에 능하고, 말 받아치기 천재였다.

두 사람은 논전(論戰)을 벌이다 1981년 크롬·구리·니켈·주석·텅스텐의 5개 광물 가격이 1990년까지 오를지 내릴지를 놓고

1000달러 내기를 걸었다. 결과는 에를리히의 완패였다.

에를리히는 1990년 가격이 떨어진 비율만큼 576달러를 물어내야 했다.

과학기술이 자원 부족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사이먼은 내기 승리로 자유시장주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그가 낸 '궁극적 자원(The Ultimate Resource)'이란 책은 인간 자체가 무궁한 자원이라고 봤다.

도서관에 인간이 70억년 먹고살 기술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이먼 논리의 강점은 최근 200년간 경험과 역사가 뒷받침해준다는 점이다.

200년 전 10억명이던 인구는 70억명으로 늘었다.

그랬어도 인간은 기근과 질병을 몰아냈고, 복지 시스템을 갖췄고, 환경과 생태를 개선해왔다.

그 '진보의 역사'는 앞으로 계속된다는 것이다.


원자력 논란도 크게 봐 세계관의 충돌이다. 원자력엔 안전 문제, 폐기물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이 이걸 극복할 수 있느냐를 놓고 비관과 낙관이 부딪친다.

과학자들이 시도하는 소듐 원자로, 고속 증식로, 모듈 원자로 등 4세대 기술이 성공하면 안전·폐기물 리스크의 상당 부분이

해소된다. 그러나 첫 상업 원전 등장 후 60년간 원자력 기술의 근본 개념은 바뀐 게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신기술도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더구나 기술 진보가 실수, 오판, 부주의라는 인적 오류(誤謬)까지 커버해주진 않는다.


반면 기술 낙관주의는 과학자들 능력을 믿는다. 인간은 150년 전만 해도 난다는 걸 상상도 못했지 않은가.

지금은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옆에 있는 것처럼 마주 보고 대화한다. 1

0년, 20년 더 지나면 원자력 기술이 부딪혀 있는 난관 정도는 넉넉히 극복할 거라는 기대가 있다.


환경주의, 생태주의의 비관적 세계관의 기여를 부인할 수 없다. 공기와 물이 깨끗해진 것은 열정적 환경운동 덕이 컸다.

생태 위기의식이 구멍 뚫렸던 오존층을 복구시켰고, 반핵(反核) 운동으로 원전 안전성은 보강됐다.

풍요만 가치의 척도여서도 안 된다. 갯벌을 아끼고 국립공원을 보호하려는 마음에도 귀중한 역할이 있다.

다만 인간 진보의 역사는 낙관적 세계관의 실효성을 더 증명해왔다.

과학기술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는 근본 생태주의 세계관이 사회 주류(主流) 자리에 서는 건 곤란하지 않을까.

'성장이 환경의 친구'라는 말도 있다. 발전해야 환경도 깨끗해진다.

환경운동은 문명 진보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것에 따라오는 리스크를 경계하는 보조(補助)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재개냐 중단이냐 양단간 결정이었다. 두 극단의 중간에 여러 타협점이 있었다.

대도시를 피해 인구 적은 곳에 짓는 방법, 안전도가 향상된 첨단 원전을 세우고 대신 노후 취약 원전은 일찍 폐로(廢爐)시키는

방안 같은 것들이다. 그랬더라면 낙관과 비관이 죽기 살기식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낙관의 토대 위에 비관 쪽 경계심을

가미하는 타협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