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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2018.01.09 02:00
지난 번 [알쓸로얄] 1편 ‘보석 1541개 박힌 왕관 썼던 이란 황후의 몰락’에선 1979년 이슬람공화국 혁명 이전에 팔라비(팔레비) 왕조가 어느 정도 위용이었나 전해드렸습니다. 이번엔 미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팔라비 일가와 그들이 고국 이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알쓸신세-알고 보면 쓸모 있는 신기한 세계뉴스]의 왕실·왕족 시리즈 [알쓸로얄] 2편 시작합니다.
![1986년 이란의 전 왕세자 레자 팔라비(팔레비)와 자스민의 결혼식. 왼쪽은 어머니 파라 디바 전 이란 황후. [사진 핀터 레스트]](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2a5867b9-a1e5-4f12-b89c-4ded23b62822.jpg)
1986년 이란의 전 왕세자 레자 팔라비(팔레비)와 자스민의 결혼식. 왼쪽은 어머니 파라 디바 전 이란 황후. [사진 핀터 레스트]
당시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 레자 팔라비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 중이었습니다. 이듬해 부왕이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세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허울뿐인 왕실의 대통을 계승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습니다. 1906년 제정된 이란 구헌법에 따르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세 번째 아내 파라 디바 팔라비입니다. 1967년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이란 황후 칭호를 받았던 호화 대관식의 주인공이죠. 비록 이란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해외에 재산을 상당히 빼돌리고 있었나 봅니다. 2016년 포브스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약 1억 달러(약 1000억원)로 추정됐습니다.
![1950년 2월 16일 이란 테헤란의 상원 의회에서 국왕(Shah) 취임 선서를 읽는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사진 위키피디아]](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193d9c9b-b269-48f0-8b0d-ed4aec948381.jpg)
1950년 2월 16일 이란 테헤란의 상원 의회에서 국왕(Shah) 취임 선서를 읽는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사진 위키피디아]
![이집트 공주이자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이란 국왕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파우지아. '클레오파트라의 환생' '아시아의 비너스'로 불릴 정도의 미인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e27d1f64-4259-4854-979f-0376d79c66a1.jpg)
이집트 공주이자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이란 국왕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파우지아. '클레오파트라의 환생' '아시아의 비너스'로 불릴 정도의 미인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두번째 국왕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의 첫번째 왕비였던 파우지아 푸아드(Fawzia Fuad). '아시아의 비너스'라고 불릴 정도의 미모의 소유자로 1942년 9월 21일 발간된 미국 '라이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ecd07179-038c-4797-8466-281af410fbdf.jpg)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두번째 국왕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의 첫번째 왕비였던 파우지아 푸아드(Fawzia Fuad). '아시아의 비너스'라고 불릴 정도의 미모의 소유자로 1942년 9월 21일 발간된 미국 '라이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하지만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딸 샤나즈가 태어난 후 파우지아는 1945년 테헤란의 왕궁을 떠나 이집트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948년 11월 이혼이 성립되면서 파우지아는 다시 이집트 공주로 돌아갔고 이혼 이듬해에 이집트 대령과 재혼했습니다.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오른쪽)과 그의 첫번째 왕비이자 이집트 공주 출신인 파우지아. [사진 위키피디아]](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ee73e4cc-895d-47f4-ae17-e6b35ebeb19a.jpg)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오른쪽)과 그의 첫번째 왕비이자 이집트 공주 출신인 파우지아. [사진 위키피디아]
![1951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과 두번째 부인 소라야의 결혼식. 소라야 왕비는 크리스천 디오르가 디자인한 깃털과 진주로 장식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사진 위키피디아]](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61bc9782-e08e-4877-8ba1-0038be8b9bf8.jpg)
1951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과 두번째 부인 소라야의 결혼식. 소라야 왕비는 크리스천 디오르가 디자인한 깃털과 진주로 장식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오른쪽)과 그의 두번째 왕비 소라야. [사진 위키피디아]](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3fe4d988-60be-46a9-b854-2eb87ed40f1f.jpg)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오른쪽)과 그의 두번째 왕비 소라야. [사진 위키피디아]
그러나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란 혁명 전후로 해외로 도피했던 이민자들, 이른바 ‘디아스포라’가 이들의 든든한 지지자들이기도 합니다. 일각에선 이란 디아스포라가 LA에만 60만명 정도 된다고 추정합니다.
![레자 팔라비 이란 왕세자.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생존해 있는 계승자다. 1960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5cad7466-edf0-4869-bb76-08eb8f6c9a44.jpg)
레자 팔라비 이란 왕세자.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생존해 있는 계승자다. 1960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그런데 이란에선 미국에 있는 파라 디바 왕비나 레자 팔라비 왕세자의 근황을 TV로 종종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죠.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파르스(PARS) TV(미국), BBC 페르시안(영국), 파르시(PARSI) 1 등 수십여개나 됩니다. 이런 채널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 볼 수 있는데 2000년 초만 해도 단속이 심했지만 이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라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는군요(구기연 『이란 도시 젊은이들, 그들만의 세상 만들기』 참조).

조선 중종 시기를 배경으로 한 MBC 역사 드라마 '대장금'. 이란에서 한류를 일으켰다.
위성 채널을 통해 할리우드나 미국 드라마가 퍼져 나가자 이란 국영방송은 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한국 드라마를 틀었습니다. 그 결과 ‘대장금’을 시작으로 ‘주몽’ ‘고맙습니다’ ‘해신’ ‘하얀 거탑’ ‘동이’ 등이 잇따라 히트했지요. 이란 당국의 보수적인 입맛에 맞게 주로 사극이나 가족 드라마를 수입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최근 이란에서 반정부·반기득권 시위가 들불처럼 일었을 때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메시저 앱 ‘텔레그램’의 서비스 차단을 시도한 것입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시위 정보를 공유하고 비판 여론이 결집하는 것을 막으려 한 거죠. 일주일 넘게 이어졌던 시위는 21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구금되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있지만, 이게 끝이라고 단정하긴 이릅니다.
인터넷·위성채널 등으로 세계와 접속하는 젊은이들, 이른바 제3세대(나슬레 세봄)가 이란에서 변화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2월 30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대학교에서 경찰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교문을 봉쇄하자 학생들이 항의하며 이를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다. [AP=연합뉴스]](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9/0f439de1-48c4-4bad-bf71-9987f6233fad.jpg)
지난해 12월 30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대학교에서 경찰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교문을 봉쇄하자 학생들이 항의하며 이를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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