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33) 모윤숙(1910~1990)
어떤 사설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708명의 친일 인사 명단을 발표했다고 들은 지는 오래지만 들춰 볼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려고 하는 시인 모윤숙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있다고 하기에 거기에 실린 700여 명의 명단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일제시대부터 우리가 훌륭한 인물로 여겨온 많은 명사의 성함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특위가 생겨 반민족 행위자로 지목되었던 친일 인사들이 일단 고발되고 조사를 받고 구속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런 절차를 밟으며 그들이 무죄판결을 받기도 하고 사면을 받기도 하여 일단 그 업무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후배들이 나서서 낡은 신문과 잡지들을 뒤져가며 단 한마디라도 일본 제국주의에 유리한 말을 하였다면 사회적 신분을 따지지 않고 정죄하고 그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경솔한 처사다. 군사재판에도 피고의 최후 진술은 있게 마련인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한마디 해명도 들어 보지 않고 민족 반역자로 몰아붙여도 된다는 말인가.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이 강행되던 그해,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거기서 소학교를 마치고 함흥에 가서 성장하였으며 그 뒤 개성에 있던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에 이화여전 문과에 들어가 3년 뒤 졸업하였다. 모윤숙은 만주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1년 잡지 '동광'에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여 문단에 이름을 올렸고 그 뒤에 서울에 돌아와 배화여고의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어떤 분의 주선으로 철학박사 안호상과 결혼을 하였으나 곧 그만뒀다. '결혼과 동시에 이혼'이라는 표현도 지나친 말이 아닐 텐데, 신랑에 대하여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그 남편이 결코 이상적 남성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모윤숙은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강한 여성이어서 남북한 동시선거를 꿈꾸던 UN이 메논을 단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서울에 파견했을 때 메논 단장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북의 김일성은 남북한 동시선거를 거부하였다. 부산 피란 시절에는 광복동에 '필승각'이라는 집을 마련하고 김활란과 합심하여 대한민국의 승리를 위해 외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꿈을 잃고 일제하에 신음하던 우리 젊은이들을 모두 감동시킨 산문시가 모윤숙의 '렌의 애가'였다. 우리는 그가 '시몬'이라고 부른 그 남성이 과연 누구일까 궁금하게 여겼다. 1937년에 모윤숙이 이 땅의 한 젊은 여성으로 그토록 사모했던 그 '시몬'은 누구일까. 혹시 춘원 이광수가 아니었을까.
모윤숙은 여장부였고 여걸이었고 뛰어난 시인이었고 훌륭한 어머니였다.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소생하여 요양 중이던 모윤숙의 자택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젊은 날의 패기는 사라졌으나 80을 바라보는 노인답지 않게 그는 당당하고 엄숙한 모습의 할머니였다. 그의 밝은 미소와 통쾌한 웃음소리가 그리운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배달의 딸 시인 모윤숙.
[첨가]
모윤숙의 시「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6월이 지나고 무궁화 꽃이 피는 7월로 접어들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썰물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기억이 있다. 초등(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때였지만, 하늘을 찢는 듯 한 전투기 소리에 방공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세상이 바뀌었다며 어른들은 저녁으로 모여앉아 ‘인공기’를 그렸고, 우리들은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되는 노래를 배우러 회당에 모였다. 우리가 ‘김일성 찬양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있는 동안에도 산맥의 골짜기 골짜기에는 한참 피어나는 꽃봉오리들이 뜨거운 피를 흘리며 몸이 식어가고 있었다.
1950년 8월 시인 모윤숙은 광주(경기도)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소위)을 만났다. 그리곤 시를 썼다.「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고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대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어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피 속엔 더 강한 혼이 소리쳐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과 가시숲을
이순신 같이 나폴레옹 같이 시이저 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머나먼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 같이
뻗어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죽음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로움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내리는 풀숲에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오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젖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유쾌히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1950년 8월 그믐 광주 산곡에서
전쟁이 막 지나간 현장에서 쓰여 진 시다. 소위는 소대장이다. 전쟁터 앞장에 서서 적의 총탄을 철모에 맞으면서도 ‘돌격 앞으로’를 외쳐야 한다. 시에 삭혀지지 않은 감정이 다소 묻어 있다하더라도 전쟁의 잔혹함을 눈으로 직접 보며 쓴 시라 탓하고 싶지 않다. 68년이 지난 현제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동의하고 싶지 않은 곳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자기의 신념에 의하여 군대를 보이콧해도 군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대체복무를 시키라는 시대다. 그것도 ‘양심적 병역거부’다. 그러나 이 시는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여있고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비참하던 1950년 8월에 쓰여 진 시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제목 자체가 큰 울림을 준다. 남자도 아닌 여자의 가슴에서 이런 시가 탄생되었다는 것에서 그녀를 ‘여장부’ ‘여걸’이라고 '뛰어난 시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1950년 한국전쟁은 이제 역사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수령이 이웃에 마실가듯 판문점에서 예고 없이 만난다. 남과 북 사이에 평화가 왔다며 장밋빛 구상들이 쏟아진다. 연예인들 체육인들이 오가며 마치 내일이라고 통일이 올 듯한 분위기다. 지금 한국전쟁 이야기를 들먹이면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냉전’으로 몰려 사람취급도 못받게 된다.
시인도 가고 그 당시 총을 메었던 군인들도 대부분 갔다. 그러나 이 땅에 평화가 와도 통일이 된다하여도 잊어서 안 될 말은, 저 현충원 국립묘지에 묻혀있는 국군 각자가 ‘죽어서 하는 말’이다. 그들이 죽어서 하는 말에 순응하여 나라가 여기까지 왔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오만해져 저들이 ‘죽어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윤숙 시인은 한일합방이 강행되던 191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거기서 소학교를 마치고 개성에 있던 호수돈 여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이화여전 문과에 들어가 3년 후 졸업했다. 만주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심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교사로 있는 동안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1년에 잡지 ‘동광’에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여 문단에 알려졌다. 그 뒤 서울에 돌아와 배화여고의 교사가 되었다. 모윤숙은 사회 정치 분야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산문시 ‘렌의 애가’는 꿈을 잃고 일제하에 신음하던 우리 젊은이들을 모두 감동시킨 절창이다. ‘시몬!~~~’
'生活文化 > 그때그일그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할 오늘] 로마 약탈(8.27) (0) | 2018.08.28 |
---|---|
[기억할 오늘] 오 헨리의 옥살이(7.24) (0) | 2018.07.24 |
[Why] "이 땅 지키다 죽어야지"… 조선의 간디는 끝내 월남을 거부했다 (0) | 2018.07.15 |
[와우! 과학] 로마 독재자 카이사르의 진짜 얼굴 3D로 복원해보니.. (0) | 2018.06.27 |
"조선시대 갑옷 기증은 한국·독일 문화협력 징표" (0) | 2018.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