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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율의 정치 읽기] 과거 정권 탓만 하는 現 정부 업적은 뭔가/[여의도포럼-이진우] 소득 없는 소득주도성장/[朝鮮칼럼 The Column] 간판만 바꿔 달면

바람아님 2018. 7. 24. 08:37

[신율의 정치 읽기] 과거 정권 탓만 하는 現 정부 업적은 뭔가

매경이코노미 2018.07.23. 13:51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16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해 ‘최저임금 시급 1만원’ 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연합뉴스>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묘소 가서 따져야 하느냐.”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한 말이다.

박지원 의원은 이 말을 두 번 정도 했다. 한 번은 성수대교 참사 이후 당시 김영삼 정권이 과거 정권을 탓하자 이 말을 했다. 두 번째는 2016년 9월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시절 ‘대화를 위해 줬던 돈이 북한의 핵개발 자금이 됐다’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 주장에 대해 반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말로 먹고사는 직종 중 하나가 정치인이다. 당연히 정치인은 묘사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당 대변인 시절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을 만들어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얼마 전 타계한 김종필 전 총리 역시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는데, 지금도 세간에서 애용하는 단어다. 이렇듯 조어(造語) 능력은 정치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박지원 의원의 이 말 역시 ‘묘사의 적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탁월한 표현이다.


새삼스럽게 박지원 의원의 이 말을 끄집어낸 이유는 요새 더불어민주당의 ‘남 탓’이 상당 수준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집권여당 원내대표로서 (고용난을) 뼈 아프게 생각한다”며 “이명박·박근혜정부는 산업 전반의 구조 개선을 소홀히 한 채 건설과 토건에만 집중했다. 수출 주도, 대기업 위주 경제정책에만 힘을 쓰다 보니 우리 경제의 기초 체질이 약해지며 고용위기가 온 것”이라 말했다. 같은 당 김태년 정책위의장도 “이명박·박근혜정부는 재정건전성 목표만 세우고 재정 역할은 포기했다. 그 결과 경기가 침체되고 출산율이 비정상적으로 낮아졌다. 삶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정부가 곳간에 돈을 쌓아놓고 재정이 건전하다고만 외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지금의 경제위기가 지난 정부 탓이라고 들릴 소지가 농후한 주장을 폈다.


물론 이런 얘기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 경제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다. 따라서 지금의 어려움은 과거의 잘못된 부분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첫째, 과거 정권의 정책이 전부 잘못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잘된 것은 살리고 잘못된 부분에만 손을 대야 하는 게 맞는 행동이 아닌가. 집권 여당은 과거 정권이 산업 전반의 구조 개선을 소홀히 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는 한다. 더불어 현 정권은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에 어느 정도 매진했는가를 묻고 싶다. 자신들이 지적하는 과거 정권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재벌 위주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면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이 성공적으로 경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득 주도 성장론이다. 소득 주도 성장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아마도 국민 대부분이 찬성할 것이다. 현실은 다르다. 현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것이 현실에 투영됐을 때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 미리 검토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고민했을까 의문이 든다. 오히려 고군분투하는 김동연 경제부총리만 안쓰럽게 보인다.


대통령은 “소득 주도 성장, 최저임금 증가의 긍정적 효과를 충분히 자신 있게 설명해야 한다”며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말하고 있고, 김동연 부총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신념’에 매몰되거나 꿀 먹은 벙어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청년실업률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자영업자 한숨은 깊어만 가고 있어 결국 금융위기 이후 체감경기가 최악이라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실제 먹고살기 힘들어 소리치는 서민의 아우성을 현 정권 담당자들은 정책 홍보가 잘못돼 나오는 문제라는 식의 자기중심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국민이 정책의 장점을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다면 굳이 홍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꾸 홍보 얘기를 하며 과거 정권 탓을 하는 것은 국민이 현 정부 정책을 체감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인들부터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데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과거 정권 탓, 홍보 부족 탓으로 책임을 돌리는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마저 생긴다.


두 번째는 이명박·박근혜정부는 재정건전성 목표만 세우고 재정 역할은 포기했다고 하는데 역으로 지금 정권은 재정 역할만 강조하고 재정건전성은 이차적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다.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재정 역할에 신경 쓰는 것이 정상이다. 과거 정권의 재정건전성 유지 기조마저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 정권의 잘한 점은 살리고 부족한 점은 바로잡는다는 기본적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이다.


세 번째, 책임정치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거 정권 탓만 하고 있고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다는 듯 말한다. 과거 정권이 보수 정권이었으므로 보수는 잘못만 저지른 사람들의 대명사라 몰아붙이는 것 같다. 진보가 역사에 기여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수도 역사에 기여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보수의 과거는 전부 적폐로 취급하고 있으니, 이 또한 문제다.


물론 보수의 행위 속에 적폐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과거 진보 정권 10년 동안 발생한 일 중에도 적폐에 해당되는 사안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지금은 보수의 적폐만이 적폐인 시대인 것 같다.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지금 보수는 숨죽이고 있거나 빈사 상태인데도 모든 잘못은 죽어가는 보수에 있다는 주장이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보수라면 몰라도 다 죽어가는 보수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그다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언론이나 학계의 중요한 역할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항해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죽은 권력의 모든 것에 대한 공격에 역량이 집중되는 것 같다.


과거를 바로잡아야 미래에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균형은 필요하다. 현 정권의 잘못도 지적하면서 과거 정권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모든 사회는 좌와 우의 균형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한쪽이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즉, 진보는 절대선이고 보수는 부패한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탈피해야 한다.


또한 현 정권이 무조건적으로 과거 정권 탓만 하기에는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다. 현 정권이 들어선 지 이제 1년 하고도 2개월 정도 지났다. 지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면 현재 나타나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는 현 정권의 능력 문제로 볼 수 있다. 처음 6개월 정도야 과거 정권 문제를 해결하고 바로잡는 데 시간과 능력을 쓸 수 있다. 또 정권 출범 6개월 정도의 시간 속에서는 새로운 업적을 보여주기 힘들다. 그러나 출범 1년이 넘은 지금 시점은 현 정권 업적을 보여줘야 할 때다.


업적을 보여주기 힘들다는 데 현 정권의 고민이 있는 모양이다. 한반도 위기, 즉 북한의 비핵화 문제 역시 지지부진하고 경제도 난리고 사회통합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업적을 내세우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 정권 탓만 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과거 정권의 잘못 때문에 지금 모든 게 안 돌아간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정권 존립 이유가 없다. 국민이 현 정권을 선택한 이유는 과거 정권 잘못을 탓하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딛고 앞으로 잘하라는 의미에서다. 지금 상황이 과거 정권 탓이라고 책임 전가만 하고 있으면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이건 책임정치도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바로잡는 것도 용기다. 지금 시점에서 정권 차원의 용기가 국민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68호 (2018.07.25~07.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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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이진우] 소득 없는 소득주도성장

국민일보 2018.07.24. 04:01

약자 배려 최저임금제도를 성장정책으로 오인한 정부
독일 최저임금 연구 결과도 소득증대 효과는 제로였다
결국 필요한 건 성장인데 정책은 길을 잃은 상황
이제라도 잘못 인정하고 시장서 방향 찾아야


모든 경제정책의 최대 적은 시장이다. 경제정책의 이념적 방향이 아무리 옳고 바람직하더라도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면 대부분 실패한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내년에 적용할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10.9% 인상한 시간당 8350원으로 결정한 것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문재인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시장이 반란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저임금의 빠른 인상이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을 높여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 목표는 옳다. 적어도 반박의 여지는 작다. 그러나 최저임금 인상이 동시에 가계소득을 높여 내수를 살리고 경제를 성장시켜서 일자리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를 가져온다는 정책적 수단은 틀렸다. 시장이 그렇게 말한다.


이 정부의 반대세력이 주목하고 또 지지자조차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경제다. 그동안 남북의 화해무드와 보수정권의 부정과 비리를 파헤치는 적폐청산으로 가려졌던 경제문제가 최저임금 논란으로 민낯을 드러내는 형국이다. 우리는 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려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정부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소득이 증대돼야 한다. 이런 목적으로 본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시장에서 결정되는 임금에 국가가 개입, 최소한의 기준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 1988년 도입돼 시행되고 있는 최저임금제도다. 간단히 말해 최저임금은 시장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복지정책이다.


문제는 이 정부가 복지정책을 성장정책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로자의 가처분 소득이 증대하면 내수 수요가 증가하고, 수요가 증가하면 생산자들이 생산 확대를 위해 투자를 더하기 때문에 일자리가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소득주도 성장론이 그것이다. 소득이 성장의 결실이 아니라 성장이 소득 증대의 효과라는 이 신화적 이론의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최저임금 인상은 과연 경제 일반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가? 최저임금제도를 우리보다 늦게 2015년 도입한 독일의 사례를 분석한 연구 결과는 대단히 시사적이다. 독일의 대표적 시사전문지 ‘슈피겔’의 보도에 의하면 최저임금제도가 하위층 근로자의 소득을 증대시키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득주도 성장론자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도 전에 반전이 있다. 단, 일자리가 증대하고 실업률이 감소하는 독일의 경제적 호황 때문이지 최저임금제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성장은커녕 노동자의 소득 증가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소득주도성장의 소득이 없다.

첫째,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 증대를 가져오지 않는다. 독일의 경우 최저임금으로 인한 소득 상승분은 근로시간 축소로 상쇄되기 때문에 소득 증대에 대한 최저임금의 효과는 결국 제로라고 한다. 열악한 자영업자가 23.9%에 달하고 최저임금 대상 근로자가 25%인 우리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인건비 절감을 위한 인원 감축, 근로시간 축소 등으로 실질소득이 증대할 가능성은 없다. 올해 1분기 하위 20% 1분위의 명목소득이 마이너스 8%로 역대 최대폭으로 줄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둘째,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률 향상에 기여하지 않는다. 소득 증대가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야 한다. 독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최저임금 인상으로 근로자 소득이 증대하더라도 고용률은 증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용지표는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15∼29세 청년 고용률은 42.7%에 그치며, 청년 실업률은 10.5%에 달한다. 청년 체감실업률은 4명에 1명꼴인 23.3%다. 소득주도성장은 시장을 모르는 진보세력이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다.


셋째, 독일의 연구가 분명히 말해주듯 성장 없이는 소득 증대도 없다. 문제는 어떻게 경제를 성장시킬 것인지 확실한 방향과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의 경제정책은 셋으로 나뉘어 중심이 없다. 신규 일자리 창출을 위한 ‘혁신성장’은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의 중간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의 후폭풍이 거세자 대기업 갑질을 조사하겠다고 하는 것처럼 경제정책이 실패할 때마다 적폐청산의 무기를 꺼내 든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념은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든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생각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이 정권이 성공하려면 지금이라도 시장에서 방향을 찾아야 한다.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고치는 게 진정한 적폐청산이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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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간판만 바꿔 달면 소득 주도 성장의 실패가 가려지는가

조선일보 2018.07.24. 03:17

 

정부, 최저임금 파장 속에 소득 주도 성장이 인심 잃자 '포용적 성장' 자주 언급
인위적 임금 引上으로 취약 계층을 밀어낸다면 선진국형 정책으로 볼 수 없어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요즘 정부와 여당이 포용적 성장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며칠 전 방송에 출연한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많은 선진국이 추구하는 포용적 성장과 소득 주도 성장이 일맥상통한다고 강조했다. 최저임금 파장 속에 소득 주도 성장이 인심을 잃는 마당에 다른 나라도 널리 사용한다는 포용적 성장으로 전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에 대한 반응도 대략 긍정적이다. 포용적 성장이 별문제 없이 받아들여지는 방향인 이상, 이를 표방하게 되면 우리 정부가 적어도 아주 궤를 벗어난 정책은 지양할 것이니 '소득 주도'를 고집하며 경제 체질을 훼손하는 것보다 낫다고 안도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로서 그런 희망은 섣부르다. 무엇보다 포용적 성장은 잘 확립된 이론 체계가 아니라 '모든 이가 성장에 참여할 수 있는 성장 방식'이라는 의미의 느슨한 수사(rhetoric)에 불과하다. 뚜렷한 정의도, 정해진 내용도 없다. 따라서 포용적 성장을 추구한다는 말은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건은 그 구체적 내용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인데, 여기서 정부의 역량과 식견이 드러나게 된다.

소득 주도 성장을 생각해보라. 이것 역시 체계화된 개념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열린 수사이다. 이를 처음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은 '소득이 증대되도록 일자리 창출에 힘써 성장으로 연결시킨다'는 뜻인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실제의 내용은 인위적으로 시장의 임금을 올려 성장을 이루겠다는 경악스러운 계획이었다. 우리처럼 최저임금 제도를 취약 근로자를 위한 불가피한 개입이 아니라 시장 임금 전반을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나라는 국가와 시장이 잘 구분되지 않아 온 남미 지역에나 집중돼 있을 뿐 선진국 중에는 찾을 수 없다.

시장에서 임금이 결정되는 과정에 작동하는 수많은 요인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특정 지점을 대폭 비틀어버리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시장의 복잡성을 깊이 이해할수록 정부 개입이 가져올 효과를 조심스럽게 가늠하고 시장 기제를 함부로 흔들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고도로 발전한 시장을 갖추었음에도 시장에 대한 정부의 이해는 선진국형이라 보기 어렵다.


소상공인의 고충이 최저임금 인상 때문이 아니라 상가임대차나 프랜차이즈 계약의 문제점, 카드 수수료 때문이라는 정부의 강변 역시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과 그에 기반한 용감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올해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닌 이상, 이것을 사전에 고려해 최저임금 인상 폭을 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의 실책을 거하게 실토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화살을 구조의 문제로 적극 돌리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포용적 성장이 선진국에서 널리 쓰이는 데다 소득 주도 성장과 비슷하다고 애써 강조하는 것은 그간의 정책 방향이 딱히 특이하지도 잘못되지도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는 무언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신호이다. 뭐라도 바꿀 생각이 있다면, 간판을 바꾸는 김에 무엇을 쇄신할지를 뚜렷이 알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지금은 정반대로 예전 간판과 새 간판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니 바꿀 것이 없다는 선언이나 진배없다.


더구나 지금 정부와 여당은 포용적 성장을 단순히 '분배를 강조하는 성장 전략'이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소득 주도 성장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가 언급하는 2009년 세계은행 보고서 '포용적 성장이란 무엇인가'는 재분배를 과도하게 강조하기보다 일자리 접근성 등 건설적 포용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또한 포용적 성장의 대부 격인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해밀턴 프로젝트는 시장 진입 이전에 상당 부분의 불평등이 결정된다는 점에 주목해 양질의 교육에 접근할 기회 형평을 강조하는 한편, 임금 격차의 주원인으로 노동시장 내 독점적 구조를 지목하고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도 임금을 억지로 올려 취약계층을 떨어내 가면서까지, 고용이 안정된 근로자의 임금만 올리는 우리 정책과 '일맥상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의 결과로 나타난 분배를 개선하되 시장 메커니즘 자체에는 개입하지 않으려는 접근은 우리와 현격히 대조된다.


소득 주도건 포용적 성장이건 그 바탕에는 시장에 대한 이해와 기본을 지키려는 자세가 깔려 있어야 한다. 어떤 간판을 내걸든 우리 상황에 맞는 성장 전략을 신중하게 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