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한국 정가를 배회하고 있다. 유령의 이름은 포퓰리즘이다. 1848년 유럽을 배회했던 유령처럼 파괴적이다. 혁명이 아니라 '교언영색'을 무기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무책임한 게 특색이다. 소위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한다. 자기 일을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는 독특한 화법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포퓰리즘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유체이탈 화법만 해도 대표적인 사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아이들이 구명조끼를 왜 입지 않느냐?", "왜 빨리 구조하지 않았느냐?" 등은 지금도 회자한다.
박 전 대통령의 포퓰리즘은 철저히 자신의 지지층만을 겨냥했고 구축된 확고부동한 지지 기반이 아직 남아있다. 그런 그는 영혼이 이탈 유체를 조정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몰락한다. 시민의 분노가 촛불로 폭발했다. 맹자의 '군주민수'(君舟民水;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라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침몰시키기도 하느니."하지만 어찌 유령이 그리 쉽게 종말을 맞으랴. 안타깝게도 포퓰리즘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각난 채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마치 손오공의 분신술처럼, 작게 변한 수많은 유령의 분신들이 정부 곳곳에서 유체이탈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래 문제가 생기면 나오는 말이 "밑에 잘하라고 했는데…"다. 부서 간 다툼이 나면 "잘 조정해서 하시오", "협의해서 잘하시오"가 답이다. 언론에서는 "모모 장관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쏟아진다. 결국 민감한 정책은 엇박자가 나고, 각 부처가 앞다퉈 인기 정책만 추진한다.
교육부는 올 초 유치원에서 영어 특별활동을 시키려다 학부모 반발로 접었고, 법무부는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를 검토하다 철회했다. 고용노동부는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업계 혼란이 일자 부랴부랴 위반 기업에 최장 6개월의 '시정기간'을 부여했다.
재정개혁특별위원회와 기획재정부는 종합부동산세 세제 개혁안을 놓고 엇박자를 내기도 했다. 지난 18일 발표된 '하반기 이후 경제여건 및 정책 방향'에서 정부는 33조 원을 쏟아 붓고도 일자리 전망치를 32만 명에서 18만 명으로 낮췄다. 근로장려금 지급 규모도 3조 8000억 원으로 3배 늘리기로 했다.
민감한 정책은 금, 토요일 발표되고, 저출산 대책 같은 '퍼주기 정책'은 주중에 발표되는 게 어느새 법칙이 됐다. 일이 꼬이면 정부 각 부서장은 스스로 묻는지도 모른다. "왜 스스로들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을까?"
마침 20일 박근혜 대통령의 항소심 재판도 열렸다. 아직도 스스로 "잘하라고 했는데…. 왜 못하고 이런 일이 있을까?"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저 정권을 뺏긴 게 잘못이라 여기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런 생각마저도 없을 것"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박근혜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이가 드물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사회 곳곳에 숨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음을 아는 이 또한 드물다.문제는 작아졌지만, 수는 더 많아졌다. 과거 문제는 거대하고 큰 권능을 지녔지만 그래도 하나였다. 그 크기만큼의 민심이 모여 그 권능만큼의 촛불을 태워 맞설 수 있었다. 우리 정가를 떠도는 포퓰리즘의 망령은 숨어 있다 문제가 불거져야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다.
군주민수도 수천, 수억의 물방울이 모여 강과 바다를 이뤘을 때야 가능한 이야기다. 포퓰리즘은 마약처럼 민심을 몽롱하게 만든다. 분노를 물방울처럼 흩어지게 해 무력화시킨다. 포퓰리즘이 정말 위험한 이유다.
정부의 모든 재산은 국민 것이다. 내게 '공짜'면 누군가의 '피땀'이다. 국가의 빚는 모두의 부담이다. 우리가 갚지 않으면 다음 세대의 부담이 된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정권은 가도 산하는 남는다). 당시인 두보가 안록산의 난으로 정권이 망한 뒤 이 산하에 남아 고생하는 백성의 모습을 한탄하며 내뱉은 시구다. 이 땅에 정권은 바뀌어도 우리와 우리 자녀는 살아남아야 한다.
박선호 금융정책부장 SH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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