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백영옥의 말과 글] [57] 걷기의 인문학

바람아님 2018. 7. 29. 08:58
조선일보 2018.07.28. 03:03
백영옥 소설가

여름 더위가 절정이다. 나는 산책을 즐기는 사람인데 요즘 공원은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열대야 때문에 걸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안은 대형 쇼핑몰 걷기, 즉 '몰링(Malling)'이다. 하지만 쇼핑몰은 걷는 거리가 크게 길지 않은데도 쉽게 피곤을 느꼈다. 이유가 있다. 걷는 동안 시각과 청각이 쉬지 않고 수많은 정보를 습득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에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비교하고 사기 위해선 눈도 귀도 손도 바쁘게 움직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걸어 다니며 제자를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逍遙學派)라 부르는 이유다. 이 학파의 공부 비결은 느리게 걷기였을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두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마음의 여행, 느긋한 관광이라 불러볼 만하다. 속도와 효율성은 시대 정신이 된 지 오래다. 손 편지는 이메일로 다시 문자메시지로 대체되었다. 더 빠른 매체로 속도를 줄여왔지만, 오히려 여유와 시간은 점점 줄어든 느낌이다.


테드(TED) 강연자 '데릭 시버스'는 매사 전력투구하며 살았다. 해변에서 자전거를 탈 때도 늘 기록 단축을 위해 페달을 밟았다. 앞만 보고 헉헉거리며 달려도 늘 기록은 43분. 어느 우연한 날, 그는 하늘을 본다. 그제야 자신이 달리던 해변가의 바다가 보였다. 그는 그날 운 좋게 돌고래와 펠리컨도 본다. 느긋한 마음으로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즐긴 그날의 레이싱 기록은 45분.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을 때보다 고작 2분이 더 걸렸다.


속도를 선택하면 풍경은 사라지고 삶의 밀도는 낮아진다. 만약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완주를 원한다면 당신의 속도로 가야 한다. 누구나 최고의 속도로 빠르게 달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최고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는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백영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