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0.04.03 이한우)
◆글로벌 히스토리란 무엇인가 : 세계사에서 지구사로, 역사학의 최전선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 지음/ 강선주 옮김/ 휴머니스트/ 2010/ 234쪽
909-ㅋ816ㄱ/ [정독]인사자실(2동2층)
'글로벌 히스토리(global history)'는 우리 학계에서 '지구사(地球史)'로 번역한다.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이후 한편으로 국가나 계급 중심의 역사가 힘을 잃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사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역사 서술 방식이다.
탈(脫)국가·국민, 탈(脫)계급·민중, 탈(脫)유럽을 지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술 주체는
'인류'가 된다. 지구사라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인류의 문명 교류 역사'에 가깝다.
동시에 방법론적으로는 '인류의 문명 교류에 초점을 둔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역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칫 너무 방대해서 방향을 잃을 수도 있는 신생 분야를 여성 역사학자 크로슬리가 분기(分岐·divergence)·
수렴(收斂·convergence)·전염(傳染·contagion)·체제(體制·system)의 네 범주로 나눠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미국 예일대의 저명한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의 제자인 그는 현재 다트머스대 역사학 교수로 중국·만주·유라시아의
기마민족을 연구하고 있다.
'분기(分岐·divergence)'는 인류나 문명 등이 과연 하나에서 갈라져 나왔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다.
모든 인류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보면 '일조설(一祖說)'이다. 인도유럽어족(語族)이 원래 유라시아 초원에서 살다가
두 집단으로 나뉘어 한 집단은 남쪽으로 이동해 이란과 인도 북부에 정착하고, 다른 집단은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에
정착했다는 주장도 일조설의 변종이다.
여기서 '전파론(傳播論)'이 나온다.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설에 입각해 우월성을 갖게 된 인종·민족이 열등한 인종·민족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유럽을 풍미하며 히틀러에까지 이어졌던 인종주의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저자인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이 결정적인 반박을 가했다.
유럽의 조상인 이집트가 아니라 중국이 기술 혁신과 과학적 통찰력의 근원임을 역사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이어 니덤은 문명의 전파가 서쪽에서 동쪽이 아니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행됐다는 '역(逆)전파론'을 내세웠다.
'수렴(收斂·convergence)'도 인류사의 중요한 국면을 설명한다.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농경이 한 지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전파론은 붕괴됐다.
농경은 여러 지역에서 별개로 발생했다.
그렇지만 농경이 시작되고서 그 지역들은 뜻밖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성을 보이며 발전했다.
세계의 보편적 변화에 대해 설명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지구사가의 범주에 들어오는 이유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요 명제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그 명제는 레닌에 의해 수정돼 소비에트 사회주의 건설로 이어졌고 사회주의 붕괴로 힘을 잃어버렸다.
저자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머스 쿤도 근세와 근대사회의 변환기점을 탐구하면서 지구사가적인 사고를 했다고
지적한다. 쿤의 책은 "베버와 마르크스 이론을 종합한 이론 가운데 가장 눈에 띄면서,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독특하게
영향을 받는 저작"이라는 것이다.
'전염(傳染·contagion)' 또한 지구사가의 주요 관심사다.
박테리아 연구가 한스 진서의 '쥐, 이, 그리고 역사'는 1960년대 역사가들의 필독서였다.
질병이 전쟁이나 외교 등 역사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1972년 알프레드 크로스비의 '콜럼버스의 교환'은 지구사에서 전염론이 주된 역할을 하게 만든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유럽은 아메리카에 천연두·홍역·콜레라 등을 전했고 그 과정에서 매독을 수입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생태제국주의'라는 저서를 냈고, 그의 1990년 작 '1918년의 인플루엔자'는 최근 국내에 번역됐다.
또 국내에 소개돼 큰 인기를 끌었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도 이런 흐름에 속하는 책이다.
다이아몬드는 지리와 환경에 보다 큰 비중을 둔다.
'체제(體制·system)'란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학자는 세계체제 이론가인 월러스틴보다 '리오리엔트(Reorient)'를 쓴
안드레 프랑크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한때 종속이론가로 이름을 날렸던 프랑크는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세계경제체제를 분석하면서 "국제무역의 하부구조를 창조하고 식민화를 진행하는 데 한층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중
국 시장"이었다며 "중국이 다시 지구의 무역과 부의 패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체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마치 20세기 초 슈펭글러류의 문명사를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이 있다.
당시에는 유럽 쇠망 필연론이었다면 지금은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 지구사는 국가 중심, 민족 중심 역사를 보완하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대체하려는 순간 역사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거시적인 시야가 주는 지적 자극만큼은 분명 시원하고 매력적이다.
기고자 : 이한우/ 본문자수 : 2768/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또 다른 역사 "빅 히스토리" 관련 글 : [현대판 '기원 이야기'] <빅 히스토리> & <시간의 지도> (프레시안 201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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