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이런 것이 외교

바람아님 2018. 10. 30. 08:56
조선일보 2018.10.29 03:16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참패로 끝났을 때 프랑스와 러시아는 원수 사이였다. 1853년 크림전쟁에선 프랑스가 영국 손을 잡고 러시아에 앙갚음하기도 했다. 그러나 1871년 독일 통일은 "프랑스혁명보다 더 중대한 사건"이라는 영국 총리 디즈레일리 말대로 유럽 안보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대(對)프로이센 전쟁에서 완패한 프랑스는 참기 힘든 수모를 겪어야 했다.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심장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그것이 1891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맺어진 배경이다. 그 시대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은 "(외교에)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우리 이익만 영원할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1930~40년대 중·일전쟁에서 2000만명이 넘는 중국인이 죽거나 다쳤다. 일본을 한 수 아래로 보던 중국인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마오쩌둥은 일본에 대한 분노를 지지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했다. 덩샤오핑은 달랐다. 개혁·개방을 하고 소련 확장을 막으려면 일본 도움이 필요했다. 1978년 중국 지도자로 처음 일본을 방문한 덩은 '미래를 향해 나가자'고 했다. 일본 지도자의 사과 뜻을 받아들였으며 과거 만행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개혁·개방 초 중국에 가장 많은 자본과 기술을 지원한 건 일본이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1978년 중·일 우호조약 체결 때도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영유권이 뜨거운 감자였다. 덩은 '후대 사람들에게 넘기자. 그들은 훨씬 총명할 것'이라며 문제를 우회했다. 하지만 2012년 일본이 센카쿠를 국유화하자 중·일 간에는 '외교 전쟁'이 벌어졌다. 2014년 시진핑 주석은 아베 총리를 처음 만났을 때 벌레 씹은 표정으로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공개 행사에서 일제를 '르커우(日寇·도적, 왜구)'라 부르기도 했다.


▶그랬던 시 주석과 아베 총리가 26일 베이징에서 활짝 웃으며 악수했다. 33조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고, 제3국 시장 공동 진출에도 합의했다. 중국 인민일보는 그제 "대세를 바로 알고 흐름을 타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했다.


▶시진핑과 아베가 손잡은 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좌충우돌 때문이다. 미국 일방주의와 무역 압박 속에서 중·일 두 나라는 트럼프에게 '이런 그림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국익 앞에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외교 격언을 그대로 실천했다. '이런 게 외교'라고 느꼈을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