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설왕설래] 귀순의 정치학

바람아님 2018. 12. 4. 07:28
세계일보 2018.12.02. 20:58

백제 개로왕 때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 “걸루와 만년은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다.” 그런 두 사람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줄이야.

개로왕 21년,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은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수도 한성을 급습했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고구려 대로인 제우와 함께 백제의 심장부를 공격했다. 두 사람은 선봉장이었던 것 같다. 북성을 함락한 후 남성을 포위했다. 남성은 위례성이다. 삼국사기,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고 성문을 불태우니 성안 사람들은 어쩔 줄 몰랐다. 개로왕은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왕은 멀리 가지 못했다. 재증걸루에게 잡혔다. 왕에게 절한 뒤 얼굴에 세 번 침을 뱉은 재증걸루. 개로왕을 아단성으로 끌고 갔다. 개로왕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아단성은 아차산성이다. 지금 그곳에는 고구려군의 보루터가 남아 있다.


두 사람은 왜 고구려로 간 걸까. 죄를 지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침을 뱉겠는가. 개로왕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음에 분명하다. 고구려 간첩인 승려 도림의 꾐에 빠진 개로왕. 화려한 궁실과 누각을 짓고, 성을 쌓아 재정을 탕진했다. 개로왕이 아들 문주왕에게 마지막 한 말, “내가 어리석어 간인을 믿고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해졌으니, 누가 나를 위해 싸우겠느냐.” 민심의 이반. 두 사람이 고구려에 귀순한 이유다.


북한군이 또 귀순했다. 사선(死線)과 같은 동부전선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왔다. 비무장지대(DMZ) 감시초소 11곳을 없앤 후 이루어진 첫 귀순이다. 북한군 소장 아들 오청성씨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총탄 세례를 뚫고 넘어온 지 1년 만이다. 남북 화해 분위기에도 남한에 온 탈북자는 지난해 1000명을 넘었다. 왜 탈출과 귀순 행렬은 이어지는 걸까. 개로왕 시대 백제와 다르지 않다.


정치 염증에 경제난까지 덮치면서 “이것저것 다 싫다”는 사람이 꽤 있다. “해외로 이민이나 가야겠다”고 한다. 그 사회공동체의 위험을 알리는 탈출과 귀순. 북한만의 일일까.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