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2.11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일반 식당도 무인 기계 열풍… 영화·기차표도 노인 소외
디지털 정보 격차 점점 커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주말이면 자주 찾는 일본 라면집에 두 대의 키오스크가 들어왔다.
사람 대신 주문 받는 무인 기계 말이다. 예단 마시길. 이 칼럼의 목적은 최저임금 인상 비판이 아니라,
디지털 격차가 빚어낸 노인 소외의 여러 풍경에 있다.
가끔 마주치던 70대 부부가 무인 기계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뜸한 시간이라면 좋았겠지만,
기계 뒤로 줄 선 손님도 여러 명. "시간 초과입니다"라는 기계음이 나왔고,
주인은 주방에서 정신없어 보였고, 노부부는 도와주겠다는 한 청년의 친절을 사양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 뒤로 이 집에서 노인 고객을 본 적은 없다.
하나 더. 1958년 탄생한 대한극장은 매년 노인영화제가 열릴 만큼 중장년 관객이 많다.
CGV나 롯데시네마 같은 대형 체인과의 경쟁을 위해 이 극장이 마련한 전략은 '반값 세트'. 가령 솔로 세트는 팝콘 하나,
탄산음료 하나, 티켓 한 장을 합쳐 9000원이다. 주말 영화표 한 장만도 1만1000원인 걸 고려하면 파격적 할인.
표 두 장인 커플 세트, 네 장 포함된 가족 세트라면 할인 폭은 더 커진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할인을 받으려면 스마트폰 앱에서 여러 번 버튼을 누르고 카드 등록과 결제를 해야 한다.
그러니 노인 관객 대부분은 매표소에 줄을 서며 경로 우대에 만족할 수밖에.
마지막으로 이번 설 명절 사례. 조치원에 사는 어르신 한 분을 안다.
아들이 코레일톡 앱을 통해 아버지 휴대폰으로 보내준 무궁화호 열차표로 역귀성을 했다.
하지만 자식이라도 매번 부탁은 미안해서 평소에는 한두 시간 일찍 역에 나와 표를 구한다고 했다.
"모바일로 기차표를 사는 시대이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앉아서, 노인들은 입석으로 서서 가더라"는 게 요즘 세태다.
편하게 말할 수도 있다. 조치원 경우처럼 자녀가 사서 부모님 폰으로 전송 버튼 누르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모든 자식이 효자·효녀인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더라도 그들이 늘 부모와 함께 사는 것도 아니다.
정보화진흥원의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 최신 통계는, 대표적 취약 계층 중에서도 맨 아래가 노인임을 보여준다.
일반 국민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을 100으로 볼 때, 저소득층 81.4, 장애인 70, 농어민 64.8, 그리고 장노년층은 58.3.
사실은 이조차도 자존심 때문에 과장한 수치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청년이 노인이 되면 더 쉽게 적응할 거라 희망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령화와 디지털 전환은 그때를 기다리지 않고 있다.
1980년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3.9%였지만, 2017년에는 13.9%였고, 6년 뒤 2025년에는 20%로 통계청은 예상한다.
라면집 70대 부부를 좌절시킨 무인 기계는 어떨까. 패스트푸드점 KFC는 90%, 롯데리아·맥도날드는 70% 매장에
설치했다는 게 최신 통계다. 할머니 유튜브 스타로 유명해진 박막례(72)씨의 무인 기계 체험 영상에는
이런 막말 독백이 있다. "×병, 카드 없고 기계 못 만지면 밥도 못 먹나."
지난해 정부는 빈 강의실 불 끄기(1243명), 전통 시장 화재 점검(800명) 등 '초단기 공공알바 사업'에 1200억원을 썼다고 한다.
차라리 청년과 노인을 1대1로 연결해서 디지털 정보 격차 해소 사업에 이 돈을 투입했다면 어땠을까.
실질적 고용 창출은 물론, 장년 세대의 돌아선 인심도 일부 되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에게 코언 형제의 영화 제목으로 익숙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원래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다.
훌륭한 선배들의 어깨에 기대 더 멀리 더 높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그리고 너무 쉽게 잊는다.
비잔티움에로의 항해 [ Sailing to Byzantium] | ||
요약 또한 변화를 겪는 현실세계를 넘어 이상세계를 꿈꾸지만 현실과 이상 간의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인식을 전달한다. 작가 W. B.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1865년 ~ 1939년)
집필 연도 1926년
작품해설 W. B.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정신과 육체, 예술과 현실, 비잔티움과 현대 아일랜드, 무한한 지성과 유한한 현실이 대비를 이루면서 그들 간의 갈등이 기본구도를 이루고 있다. 예이츠에게 비잔티움은 생물이 활동하는 세계와는 반대되는 예술이나 예술품의 세계이고, 유한한 젊음에 탐닉하는 현실의 관능적 세계와 달리 시간을 초월한 지성과 영원의 세계이다. 예이츠에 따르면 초기 비잔티움은 역사상 유례없이 종교와 예술과 실제의 삶이 하나로 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예술이 소수가 아닌 전체 대중에게 수용되는 총체적인 사회였다. 이 시에서 시인은 노년에 이르러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육체의 세계에 대한 환멸과 영원한 정신의 세계인 예술에 대해 강렬한 동경을 보여준다. 작품내용 1연에서 시인은 노년에 이른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젊은이들과 산란기에 처한 바다의 고등어, 짐승, 새들이 모두 여름을 찬미하며 관능적인 쾌락에 사로잡혀 있어 영원히 변치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경시한다고 비판한다. 이어 이러한 세계에서 자신과 같은 늙은이는 그저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뿐이므로 영혼의 원숙한 기념비를 노래하지 않는다면 노년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인간임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비잔티움으로 항해해 온 이유를 밝힌다. 3연에서는 비잔티움 교회의 모자이크 벽화에 그려진 성인들에게 자신도 영원한 예술품의 세계로 초월하고 싶다고 간절하게 기원한다. 이어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유한한 자연의 세계를 벗어나 금으로 세공된 새와 같은 예술품이 되어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세계를 노래하고 싶다고 끝을 맺는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아이러니 혹은 모순은 시인이 영원히 남을 예술품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그 예술이 노래하는 내용은 변화를 거듭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순은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으며, 인간 삶과 역사는 끊임없이 그 갈등의 과정에 처해있다는 예이츠의 궁극적인 생각을 전달한다.
작품 속의 명문장 늙은이는 그저 하나의 하챦은 물건, 노년에 이른 시인의 무력감과 소외감이 잘 나타나 있고 그래서 더 유한한 육체의 쾌락을 벗어나 보다 심원한 영혼의 노래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잔티움에로의 항해 [Sailing to Byzantium]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영미문학, 2013. 11., 박미정, 이동일, 위키미디어 커먼즈)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No country for old men 블로그내 같이 읽을 거리 : [이미도의 무비 識道樂] [73] There are no laws left (조선일보 2018.0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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