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살며 생각하며>가장 좋은 화장품

바람아님 2019. 2. 23. 07:11
문화일보 2019.02.22. 14:40



내 단골 밥집 50代 아주머니
‘립스틱 아주 살짝’ 이 전부…

사람 마음은 99% 얼굴에 중계
표정은 뿌린 대로 거둔 농산물

친절한 단골 식당 잃고서야
거울 보며 “친절했나” 반성


‘화장품이 너무 비싸요.’ 직장 여성도 아닌 여고생들의 푸념이다. 화장품 고르는 재미로 해외여행을 간다는 여중생도 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다르게 말한다. ‘딸바보 월급쟁이 등골이 빠져요.’

여자는 왜 화장을 할까. 프랑스 시인이 답했다. ‘여자가 화장 말고 도대체 무얼 한단 말인가?’ 거기 맞장구를 치듯 서울의 어느 화장품 대리점이 이런 카피를 내걸었다. ‘누가 감히 아름다움을 거부하는가’.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고 수군거렸지만 다들 순응했다.

여자들이 스마트폰과 개·고양이를 애지중지하는 것 같아도, 정작 보물처럼 집에 모셔 놓은 것은 화장품이다. 내 주변만 해도 화장을 안 하는 여자는 한 명도 없다. 화장이야말로 여성의 존재 이유이자 지켜야 할 법도라 생각한다.

화장품에는 풋풋한 여인의 향기만이 아니고 비애도 함께 있다. 정성을 다한 화장을 밤이면 모두 지우기 때문이다. 화장 안 하는 남자가 봐도 참 아깝다. 그렇다고 낭비라고 할 수 없는 허망한 소비 패턴. 화장하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울며 겨자 먹는 여성도 적지 않다.


그 강고한 무한 소비를 외면한 여인이 있었다. 내 단골 밥집의 갓 50대 아주머니. 그는 세수를 하고 ‘립스틱 아주 살짝’이 화장의 전부였다. 정확히 10초 걸린다고 한다. 대신 그는 활짝 웃으면서 손님을 맞는다. 반찬 그릇이 비기 전에 얼른 보충해 주는 몸짓이 빠르면서 정중하다. 단골손님 모두가 그 밥집의 ‘친절 포로’가 됐다. 아주머니 얼굴에는 턱 쪽에 동전 크기만 한 화상 자국이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마음 쓸 여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손님이 식사를 잘 할 수 있을까, 늘 그 생각뿐이다. 아주머니는 식당의 주인도 친척도 아니었다. 여성으로서 흠일 수도 있는 화상 자국이 오히려 착한 아주머니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나는 순두부를 먹으면서 ‘사람은 얼굴이 아니고 표정’임을 깨달았다. 화장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람의 표정은 뇌와 신경세포가 합작한 고화질 얼굴 화면이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라는 옛말은 그래서 근거가 있다. 어찌 여자만이랴. 남자도 착하고 성실해야 좋은 화면이 뜬다. ‘싸나이들’의 얼굴 표정이 곧 현장검증이요, 그 사람의 이력서다. 점쟁이들이 주역이 어쩌고 떠들지만, 대개의 선무당은 손님 얼굴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고 지난 일을 맞히고 앞날을 예측한다. 백마를 타지도 않은 남자가 백마 탄 왕자인 척해도 여자들은 금방 안다. ‘알바 자리 구하고 있어요.’ 표정에 씌어 있기 때문이다.

노점상을 하는 이가, 자기는 경제는 모르지만, 택시기사와 호프집 사장 표정을 보면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든지 아닌지 척 안다고 한다.


표정을 짓느라 따로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게 쉽지가 않다. 잠시 심심할 뿐인데, 왜 그리 쓸쓸한 얼굴이냐 동정한다. 정말로 고독한 얼굴을 하면 배고프냐, 어디 아프냐 한다. 축구 심판처럼 오심도 있지만, 그러나 사람 마음은 99% 얼굴에 중계된다. 크든 작든 필연코 대가가 따른다. 웃는 얼굴은 환영받지만, 자칫 험악한 화면(표정)을 내보내면 반드시 화가 따른다. 막말까지 곁들이면 대판 싸움으로 번진다. 젊은 연인들의 한순간 표정이 그대로 역사가 된다.

‘냉정해야 하는데 마음 약한 표정 한 번에 그만 이 남자랑….’ ‘그만 이 여자한테 코가 꿰었어요.’ 원님 지나가고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다.


당연히 반대 경우도 많다. 화장도 안 하고 거의 생얼로 나갔는데 이게 웬일!? 첫인상이 좋았다는 이유로 회장님 사모님으로 팔자를 고친 여인도 있다. 그러나 ‘첫인상’이 있기까지 긴 세월 쌓아온 내공을 간과해선 안 된다. 스포츠 스타들의 남몰래 흘리는 땀방울. 끝없이 반복한 슈팅… 배팅… 퍼팅…, 그게 내공이다. 쉽게 꾸민 표정은 급히 한 화장처럼 멋도 맛도 깊이도 없다.

표정이란 뿌린 대로 거둔 농산물. 1인 연극 무대, 혼자 하는 코미디이면서, 때로는 뼈를 깎는 맹세요, 피를 토하는 울분 같은 것이다.


일이 바빠 한동안 못 간 단골 식당을 갔다가 깜짝 놀랐다. 밥집이 홀연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스마트폰 대리점이 들어서 있었다.

그렇게 맛있고 친절한 식당이 왜 망했을까. 아니면 충분한 보상을 받고 이사를 갔을까. 그 아주머니는? 나는 길바닥에까지 덕지덕지 붙여 놓은 광고판 위에 한참을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친절도 중독성이 있었다. 미리 알았으면 립스틱 하나쯤 작별 선물로 드렸을 텐데…. 콩나물과 시금치를 많이 얻어먹어서 하는 빈말이 절대 아니다.


음악을 별로 즐기지 않는 이도 이런 노랫말을 기억하거나 불러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눈사람

눈썹이 흐렸구나 코도 삐뚤고….’

눈사람은 금방 녹거나 치워져 없어지지만, 인간의 표정은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이어진다. 나는 단골 밥집을 허망하게 잃고서야 거울을 보며 반성문을 썼다. 그렇게 친절에 목을 매면서 남한테는 얼마나 친절했나. 눈썹이 흐리고 코는 삐뚤지 않았나. 젊은 날의 초심을 모두 버리고 오만의 밀짚모자를 쓰고 있지 않은가….


거울은 창의성은 전혀 없어도 자세히 보여준다. 말은 못 해도 인간의 한숨과 탄식을 진지하게 들어준다. 그래서 여인들의 거울 앞에 가면 빛이 나는가. 그러나 사실은, 아침마다 거울은 마법처럼 이렇게 속삭인다.

‘화장품이 좋군요. 피부는 더 좋고요. 그런데 미흡해요. 아직 아직 미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