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2.23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51세에 은퇴한 지인이 있다.
30대부터 은퇴가 꿈이었던 그는 "은퇴하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정말 조기 은퇴했다.
많이 놀랐다. 자발적 은퇴자인 그의 꿈 세계 일주는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 알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은퇴만 하면 떠날 줄 알았던 그가 한국에 있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혐기증(嫌氣症)이 생겼다고 했다.
비행기를 타면 숨쉬기도 힘들고, 기체가 조금만 흔들려도 온몸이 뻣뻣해져 공황장애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병원에 가도 딱히 발병의 이유를 알 수 없다가 어느 날 이전에 비해 가진 게 많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고 했다.
사는 게 힘들고 일이 안 풀릴 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었는데, 시간과 돈이 있는 지금은 그걸 누리지 못하고
죽게 될까 봐 없던 공포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가 고등학교 교과서 중에 아직 버리지 못한 게 있는데, 그게 지리과 부도였다.
어려서는 늘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 지도에서 그곳의 지명을 찾았다.
"인도양에 있는 크리스마스섬에 꼭 가보고 싶었거든. 근데 이제 그 풍경이 궁금하지 않아.
구글 맵의 로드뷰로 다 봤거든. 거길 굳이 꼭 가 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의 얘기는 얼핏 소설 '고령화 가족'의 문장을 연상시켰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그의 말이 짠하여 술잔을 기울이다가 마지막 말에 안심했다.
"이제 냉면 먹을 때 좋아하는 계란을 맨 나중에 먹지 않으려고.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마음 가는 대로 살려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 역시 결심했다.
모둠 초밥을 먹는다면 이제 참치 뱃살부터 먹으리. 빨리 시들어 아름다운 것이 꽃이고 단풍인 걸 알았으니,
이제 계절이 바뀌면 가장 먼저 두 눈에 담아두는 사람이 되리.
고령화 가족 : 천명관 장편소설 | |
고령화 가족 |
가족의 파산 : 장수가 부른 공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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