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문재인·트럼프 한미 정상이 전화 통화를 했다.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드디어 두 사람 통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약 35분 정도 통화를 했다고 하는데, 인사말을 빼고, 또 양측 통역을 빼면 실질적인 대화를 얼마 나눴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밤에 청와대에서 밝힌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했다는 발언이다. "남북 사이의 철도·도로 연결부터 남북 경제협력 사업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다면,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고, 그것이 미국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떤 신문도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기에 ‘김광일의 입’은 몇 가지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하는 문 대통령의 어법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일국의 대통령 입에서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는 말을 상대국 정상에게 하는 법은 없다. 독립적 주권을 가진 국가가, 그 신성한 주권을 위임 받은 우리 대통령이 상대국 정상에게 "당신이 요구하면" "나는 (무슨) 각오가 돼 있다"는 발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대통령의 입에서 "(무슨) 각오가 돼 있다"는 말은, 오로지, 권한을 위임해준 주권자, 즉 국민들께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니 어떻게 나라의 상징이요 일국의 대표인 대통령이 상대국 정상에게 대북 경협의 모든 경비와 부담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는 말을 하는가. 이것은 전쟁에 진 어떤 패전국 대통령이 승전국 대통령에게조차 써서는 안 되는 표현법이다.
둘째. 설령 문 대통령이 비슷한 언질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우리 청와대 입으로 공개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문 대통령이 이번 미·북 정상회담에서 아무쪼록 성과를 내도록 이끌고 싶은 욕심이 넘치다보니, 앞으로 발생하는 경협 자금을 일부분 부담할 수도 있다는 뜻을 트럼프에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청와대가 그런 통화 내용을 공개할 것은 못 된다. 문 정권이 비록 북한 비핵화 협상 테이블의 의자에 앉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북한 비핵화의 협상에서 제1의 직접 당사자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이때 협상 당사자는 절대 협상 카드를 먼저 꺼내 보이는 법이 아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엄청난 뒷감당을 책임져야할 말을 쏟아놓고 말았고, 청와대는 그것을 발표하고 말았다. 나중에 트럼프나 김정은이 문 대통령의 발언을 근거로 나름대로 해석까지 덧붙인 뒤 마치 빚쟁이 독촉하듯 청구서를 내밀면 어떡하려고 그러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셋째, 대북 경협 자금, 모든 경비와 부담을 떠안는 문제는 수십 조 원을 훌쩍 넘는 천문학적 액수가 예상된다. 경우에 따라 백 조 단위로 뛸 수도 있다. 당연히 국회의 승인 절차가 필요한 대목이다. 대통령은 엄청난 권한을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국회의 승인이 없으면 국민 세금을 단 돈 1원 한 장도 쓸 수 없다. ‘떠맡을 각오’ 운운한 대목은 삼권분립 원칙과 국회를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경우 대통령의 발언은 일부러 에둘러서 간접적이어야 하고, 일부러 모호하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전 실무 협상에서는 이젠 ‘비핵화’라는 말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준다. 지금 ‘비핵화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조건 ‘퍼주기 협상’을 하려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조선일보는 ‘비핵화가 사라졌다’는 톱 제목을 달았다. 이것은 1차 미·북 회담, 2차 미·북 회담을 거치는 사이에 어느덧 북한이 명실상부한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는 뼈저린 지적이기도 하다.
지난해 4분기 소득 통계가 나왔는데, 최하위 20%, 즉 빈곤층 소득이 1년 전보다 무려 18%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세금으로 주는 공적 보조금을 빼면 무려 30%나 줄었다. 최저임금과 관련이 큰 근로소득은 37%가 줄었다. 눈을 의심케 하는 충격적 통계다. 그 사람들부터 살리겠다는 소득주도 성장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수출은 3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그런데 여유 있는 국민들은 해외에서 씀씀이가 커져 해외 카드 사용이 12%나 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문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대북 경협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는 말이나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문 대통령이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한지 불과 몇 시간 만에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에는) 시간표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대통령은 언제 거래가 이뤄질지도 모르는 저들에게 ‘무기한 백지 수표’를 써준 셈이다.
국민일보는 우리가 사실상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는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국민들 어깨에 십자가를 지우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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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리포트] 우리 패는 깠고, '트럼프 카드'만 남았다
文, 남북경협 먼저 밝혀 북은 이미 선물 받은 셈
'빈손 외교' 압력 의식한 트럼프 뚝심에 기댈 처지
다음 주 열리는 2차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베트남 하노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정상회담 때는 급반전으로 허탈감을 주는 리얼리티 쇼를 본 것 같았다. 지금은 스릴러 영화를 보기 직전의 기분이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 회견장에서 아무 대가 없이 한·미 연합 군사훈련 일시 중단을 즉흥적으로 결정해버렸듯 이번엔 또 어떤 카드를 던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이클 모렐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 대행은 "보스니아 내전을 해결한 데이턴 평화협정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는 "때로 외교적 협상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물론 기대는 한다. 트럼프도, 김정은도 싱가포르 회담 결과 수준을 반복하면서 회담을 이어갈 순 없을 것이다.
요즘 워싱턴 분위기를 요약하면 '크게 기대는 안 하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걱정된다' 정도이다. 작은 진전을 이뤄 대화 분위기를 이어갈 수는 있으리라고 본다. 정상회담이 정례화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하지만 비핵화 진전 없는 미·북 정상회담 지속은 북한을 점점 더 사실상 핵 국가로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북한 비핵화를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다. 회담 전 김정은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해석하자면 '미국은 북한 비핵화에 시간이 걸려도 급할 게 없지만 제재 때문에 죽을 지경인 북한은 다급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제재를 풀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북한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며칠 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제재 완화를 해줄 수도 있다고 했던 것과 비슷한 발언이다.
미국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비핵화 이전에 제재 완화 없다'이다. 하지만 2차 정상회담 핵심 의제는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 방안보다는 미국의 제재 완화 여부에 쏠리는 분위기이다. 북한이 끈질기게 제재 완화를 밀어붙인 결과이다. 북한 김영철 통전부장이 지난달 김정은 친서를 들고 워싱턴에 와서 트럼프를 만났을 때 전한 핵심 메시지도 제재 완화였다고 한다.
대북 제재의 역사는 길다. 북한의 첫 핵실험 이후인 2006년 이후로만 잡아도 유엔안보리 제재와 미국 독자 제재가 촘촘하게 얽혀 있다. 유엔 제재는 국제사회가 유엔 결의안에 따라 결정한 것이다. 미국이 결심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독자 제재 역시 정상회담 한 번으로 걷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론됐던 '느슨한 고리'가 한국 정부가 적극 민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였다. 제재의 일반 원칙을 허물지 않으면서 '제재 면제'라는 방식으로 우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재 원칙에 대한 타격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은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트럼프와 통화에서 남북경협 부담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
워싱턴의 한 전문가는 "정상회담을 하기도 전에 한국이 먼저 지원 의사를 밝히는 바람에 미국이 남북경협 제재 면제를 북한 비핵화를 유인할 카드로 쓰기는 어렵게 됐다"고 했다. 북한 입장에선 이미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재 완화를 끈덕지게 밀어붙여 남북경협 제재 면제란 선물을 받는 것이 애초에 북한이 2차 정상회담에 거는 단기 목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트럼프라도 '빈손' 외교에 대한 민주당과 전문가들의 비판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이 말로 약속만 하고 제재 완화라는 복권에 당첨되는 걸 막는 건 의외로 트럼프가 받고 있는 국내 정치 압력일 수 있다.
"개성·금강산 재개 안된다"…文구상에 찬물 끼얹은 고노
[중앙일보] 2019.02.22 17:29고노 외상 "북 비핵화 전에 제재 완화 안돼"
문재인-트럼프 '남북경협' 긍정 논의에 찬물
22일 오후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상의 기자회견에선 이틀 전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화회담 내용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한 기자가 “두 정상이 전화회담을 했을 때 남북 경제협력의 용의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 제재의 일부 완화가 필요하다고 했다”면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물었다.
남북경협은 제재가 완화된 뒤에 가능한 일이며, 그를 위해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의 발언을 한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의 진전을 보이지 않는 한 남북경협이나 일부 제재 완화도 있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고노 외상은 이어 “북한이 요구하는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 재개를 제재의 예외로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냐”라는 질문에 “그런 생각이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문 대통령은 전화회담에서 “남북 사이 철도, 도로 연결부터 남북 경협사업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다면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있다”면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견인하기 위한 상응조처로 한국의 역할을 활용해달라”고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20일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 보인 상황에서 일본 외상의 발언은 한·미·일 공조 체제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일본은 비핵화의 진전 없이는 제재완화를 해선 안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고노 외상은 지난 21일밤 마이크 폼페오 국무장관과의 전화회담에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언급했다.
고노 외상은 “핵무기 뿐 아니라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대량파괴무기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와 모든 사정거리의 미사일 폐기를 위해 미·일은 계속해서 연계하고 있으며, 방향성도 딱 맞아 있다”고 강조했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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