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65] '강제 이주'된 가야 유민들

바람아님 2019. 3. 27. 07:15

(조선일보 2019.03.27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92년 6월 1일 관동대박물관 이상수 연구원은 이용관 조교 등 조사원들과 함께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북평공단 조성 부지에서 확인된 여러 유적 가운데 신라 고분이 분포하는 'B지구'를 선정해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밝혀 볼 참이었다.


조사 대상지는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산 위였다.

산 정상부의 겉흙을 걷어내자 곳곳에서 석실묘와 석곽묘가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은 작은 편이었고 길이가 2m 내외인 것이 많았다.

유물 가운데 다수는 6~7세기 신라 토기였다.


대가야 양식 토기, 추암동 B지구 고분군, 국립춘천박물관.

대가야 양식 토기, 추암동 B지구 고분군, 국립춘천박물관.


10월 초에 이르러 길이가 1.98m에 불과한 '가-21호묘'에서 특별한 유물이 출토됐다.

신라 금관의 모티브를 계승한 동관(銅冠)이 그것이다. 신라 금관에 비해 문양은 현저히 퇴화된 것이며

성년 여성의 인골이 함께 출토됐다.

이 연구원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후대의 무녀에 비교할 수 있는 '종교적 특수 신분자'로 추정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무덤은 55기나 됐다. 발굴을 끝내고 유물을 정리하던 이 연구원은 신라 토기와 사뭇 다른

일군의 토기가 섞여 있음을 인지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이나 합천 삼가고분군에서 출토된 바 있는 대가야 양식 토기였다.


'대가야 토기가 왜 이토록 먼 곳에서 무더기로 나온 걸까?' 이 연구원은 고민에 빠졌다.

처음엔 교류의 산물일 가능성도 고려했지만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점, 대가야 멸망기의 토기에 한정되는 점,

일부는 추암동 일원에서 제작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사민(徙民)의 결과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의 생각은 학계의 후속 연구로 이어졌다.


562년 나라가 패망하자 망국의 유민으로 살아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을 대가야 사람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는 정든 고향에서도 쫓겨나 먼 타지로 '강제 이주'된 것 같다.

추암동고분군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며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갔을 대가야 유민들의 삶을 오늘날까지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