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5.10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고다이로(五大老)의 좌장으로 국정 주도권을 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곧바로 전후 처리 외교에 나선다. 조선 강화(講和)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쓰시마의 소(宗)씨였다. 국교가 재개된 1607년까지 총 23회에 걸쳐 소씨의 사절이 조선을 찾았을 정도로
소씨는 필사적이었다. 전란 직후 교섭은 좀처럼 진전되지 못했다. 명군은 일본군 철군 후에도 2년여를
더 조선에 머무르면서 조선군과 연합군 체제를 유지한 채 일본의 재침(再侵)을 경계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올라 일본 권부에서 히데요시의 잔영이 제거되자 조선도 변화를 모색한다.
1604년 여름 사명당 유정(惟政) 일행이 최초로 일본을 방문한다. 적의 동태를 살핀다는 이른바 탐적사(探賊使)였다.
이듬해 봄 교토에서 유정을 마주한 이에야스는 자신이 전란(戰亂)의 병사(兵事)에 관여하지 않아 조선과 원한이 없음을
강조하고, 화친의 증거로 유정이 요구한 포로 1400명의 귀환에 동의한다.
조선 조정은 탐적사의 보고를 토대로 강화를 검토하는 한편, 일본 의향을 재삼 확인하기 위해 국왕 묘를 훼손한 '범릉적
(犯陵賊)'을 압송하고 일본이 먼저 국서(國書)를 보내라는 '선위치서(先爲致書)' 조건을 제시한다.
교섭이 암초에 걸리는 듯했으나, 1606년 가을 일본으로부터 범인과 국서가 도착한다.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조선은 일본의 성의를 수용하고 강화를 결정한다. 1607년 국교 재개를 상징하는 조선의 사절이 일본을 찾았고,
이후 양국은 에도시대 260년간 유례없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다 .
전란 종료 후 화친에 이르는 길은 불신(不信)으로 가득 찬 험난한 과정이었다. 불신을 신뢰로 바꾼 것은 '행동'이었다.
교섭의 고비마다 조선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했고, 일본이 행동으로 성의를 보임으로써 화친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상대의 의도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예외를 찾기 어려운 국가 관계의 평범한 진리이다.
'人文,社會科學 > 敎養·提言.思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김정일 "쭈더가 누군가" 호통 中사령관 이름 다시'주덕'으로 (0) | 2019.07.07 |
---|---|
[백영옥의 말과 글] [106] 변화에 대하여 (0) | 2019.07.06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3] 일본의 우치벤케이 외교 (0) | 2019.07.05 |
[정여울의 마음풍경] 열등감을 딛고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길 (0) | 2019.07.05 |
[삶과 문화] 그녀의 소리 없는 반란 (0) | 2019.07.02 |